EBS 위대한 수업2(한일 근대사) 4강~5강 요약정리
위대한 예순네 번째 강연 '한일 근대사'(시즌2 스물 두 번째)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역사학과 교수
2015년 만해상 수상
4강 105인 사건과 미국인 사찰단
- 1910~19년
· 이 당시 한국으로 파견된 일본 지도자들은 도쿄의 천황에게만 충성했고 고문을 활용해 한국인을 통제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후임자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초대 조선 총독) 총독은 "너희를 채찍으로 다스리겠다"며
부임 즉시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려 한다
그는 한국에 거주하던 소수의 외국인뿐만 아니라 기도교를 받아들인 한반도 북부의 한국인에도 대응해야 했다
총독과 일본 통치자들은 이를 깊이 걱정한다
기독교가 무장 저항은 아니지만 일종의 저항 운동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만든 질서를 위협한다고 여겨 데라우치는 기독교를 숙청하기로 한다
또한 외국인들이 사업차 한국에 체류하는 미국인이나 영국인이 계속 머물려면
일본 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105인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투옥한 사건_105인 사건
이 사건은 1911년에 시작해 이듬해에도 계속됐다
데라우치 총독은 철권통치가 순조로울지 확신이 없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북부에 있는 한국 기독교인을 체포하고 여러 교도소에 가둔다
당시 적용한 혐의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 피살 사건을 참고한 것이었다
그는 총독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력 용의자를 체포하는데 유명한 지식인들도 있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잠재적인 위협을 지닌 지식인들이자 여전히 한민족 정체성을 주장하는
이들을 체포했다
일본 정부는 기독교를 싸잡아 일본의 한국 통치를 약화할 수 있는 잠재 세력으로 규정했다
동시에 일본인들은 외국인의 존재도 우려했다(예를 들어 미국 선교단과 사업가들)
당시 한국 교회에는 이들의 가족도 다녔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밀어붙여도 괜찮을지 시험해 본 것이다
데라우치는 수백 명의 청년을 감옥에 가뒀는데 조지 맥큔(1873~1941, 선교사)이라는 미국인도 체포했다
이 사건이 중요한 건 특정 부류의 사람이 다 우월해서가 아니다
이 미국인을 체포한 방식으로 인해 국제 시찰단이 파견됐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법적 통치가
전 세계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2년쯤 걸리긴 했지만 미국 장로교 선교위원회에서도 소속 선교사가 한국에 있는 일본 감옥에 수감된 데
주목한다
선교 위원회 본부가 있는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 수차례 회의가 열렸는데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을 비롯해
당대의 유력가들이 참석했다
명망 높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논의를 펼쳤다(일본이 한국을 이토록 강경하게 통치해도 되는지에 대해서)
이제 미국인까지 수감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울 내 일본의 법 절차를 사찰할 대표단을 파견한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1차 공판(경성지방법원_1912년 6월 28일)
1912년 여름에 열린 첫 재판은 일본 측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았다
부당한 재판이라는 게 명백했다, 지방 법원에서 열린 재판이었는데 방대한 기록이 있다
재판을 지켜본 미국인은 방대한 양의 서신을 필라델피아와 뉴욕의 선교위원회로 보낸다
일본의 사법 체계가 명백히 기준 미달이라고 전했다
그때부터 일본 관료들은 이 재판의 향방을 주시한다
여기서 이론상으로는 흥미롭지만 사실상 섬뜩한 일이 벌어진다
이후 항소가 진행되는 1년 반 동안 조선총독부는 일치단결해 일본의 법적 수준을 홍보한다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의 열강과 동등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한국 점령 전반에 걸쳐 반복됐다
일본이 한국에서 중국을 몰아냈을 때도(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_1895)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할 때도(을사늑약_1905)
군대를 둘 능력을 박탈할 때도(대한제국군 해산_1907)
국가로서의 지위를 탈취할 때도(한일병합_1910)
이제 수위가 한층 심각해져 한국인에 대한 합법적 고문을 일본법에 명시한다(오로지 한국인에 대해서만)
선교사들은 수감자의 증언을 꼼꼼하게 청취했는데 감옥에서 다양한 고문이 이뤄지고 있었다
손가락을 묶어 매달고, 물고문을 하고, 끊임없이 매질했다
일본인과의 차별을 법에서 분명히 했다(일본인은 고문하지 않고 한국인만 고문한다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법적 통치를 시찰하러 온 외국인 선교위원회는 이번 항소심 재판에서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
"통역사를 붙여줘서 소송 과정을 이해하겠군"
죄수들이 이런 말을 했음에도 말이다, "매질을 당했습니다", "강제로 수감됐어요", "전 죄가 없어요"
시찰단은 재판을 이해할 수 있었고 재판은 합법적으로 보이도록 연출됐다
심지어 법정 내부에 페인트칠가지 했는데 시찰단이 보낸 서신에 자주 언급됐다
"페인트를 새로 칠했고 의자도 좋았어요"
이렇게 연극처럼 연출한 재판을 통해 일본은 서울에 남은 강대국들을 이렇게 설득할 수 있었다
일본 법은 한국의 국법이다, 이 법은 한국인이 아닌 자는 고문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에 대한 고문은 법적으로 인정한다
1910년대 일본의 한국 통치는 분명 잔혹했다
그 사실이 해외로 보도되지 않은 이유는 그 문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전 세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이 시기의 잔혹한 통치를 인지한 건 상황이 된 고종이 사망하며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다
1919년 고종 승하
고종이 사망하자 고종의 신하와 지지자는 일본 경찰에게 장례 행렬을 허가해 달라고 호소한다
한국을 완전히 지배했다는 자신감에 일본은 장례 행렬을 허가한다
이 장례 행렬은 한국 전역으로 퍼진 대규모 시위의 발단이 된다
우리가 아는 한국의 위대한 독립운동이다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비폭력 만세 운동_3.1 운동
이 사건을 극심한 폭력을 규탄한 순간으로 본다면 이 운동이 왜 그렇게 강렬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
3.1 운동이 한국 전역에 퍼진 과정과 일본 경찰이 시위대에 가한 잔혹한 탄압을 본다면 앞선 상황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한국인들은 국가를 재건하기로 결심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승만과 김구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해 이끌었다
이건 3.1 운동의 결과이다
이들이 무엇을 피하고자 한국을 벗어났는지도 중요하다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저항 운동가들은 어디 있었어?, 왜 한국인들은 스스로 맞서 싸우지 않았지?
하지만 그건 법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시기 한국 내에서 저항하는 건 사회적으로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조선총독부에서 도입한 법률이 한국인에 대한 고문을 합법화했다
폭력은 양국의 근대사를 다룰 때 무척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야 일본이 전면전을 펼치기 전인 1920~30년대를 살필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를 구별해 1910년대 무단통치기가 1920년대 문화통치기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야 한다
문화통치기에 일본은 동화 정책을 한층 넓게 펼치며 한국을 완전히 일본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이는 극도로 잔혹했던 10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5강 기록과 기억의 싸움
- 역사와 기억
· 지금 동북아시아에는 역사 문제가 남아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역사의 무기화이다"
1945년 일본제국의 패망
1945년 일본제국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연합국에 끔찍한 패배를 당했다
대도시 66곳 중 62곳이 황폐해졌다, 주로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민간인을 노린 핵폭탄이 떨어졌다
그렇게 일본 본토가 초토화됐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한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연합군을 상대로 참전한 것이 아니라 식민화되어 전장에 끌려간 것이다
이 사실도 무척 중요하다, 강제노동이나 성노예 등은 여전히 까다로운 역사이다
오늘날까지 한일 양국에 뜨거운 쟁점으로 남아있다
이와 함께 우리가 인지해야 할 부분은 일본이 '그레이트 게임'의 정치 공식에 따라 참전했고
다른 제국 열강의 행보를 답습했다는 것이다, 피식민자를 전장으로 데려갔다
일부 한국인은 자발적으로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해서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해 연합군과 싸웠다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 19세기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 전쟁
이와 달리 강제로 징집된 한국인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명심해야 할 건 양측 모두 피식민자라는 것이다
1945년 이전 제국 사회에는 위계가 존재했고 일본이 한국을 지배할 때는 더 심했다
대리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일본 이름으로 개명해 일본군에 자진 입대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피식민자일 뿐이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이 모든 개념은 붕괴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한국은 참전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전장에 존재했단 것이다
오늘날 그 사실이 중요한 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가 대중 기억과 관련한
싸움에 이용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인 동료 역사가의 유용한 구분법에 의하면
이른바 '역사 전쟁'이란 역사가들이 기록을 두고 싸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역사 전쟁은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기억 전쟁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광범위한 과거 차원에서 논의된다는 점에서 오늘날 동북아시아의 '기억 싸움', '역사 전쟁'과 유사하다
저명한 근대 일본 역사가인 존 다우어(1938~, 미국의 역사학자)가 말한 바 있다
패배하면 전사자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일본은 수많은 근대 전쟁을 치르며 중국과 러시아를 꺾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승리 진영에 있었고 그러다 엄청난 패배를 겪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그 순간은 일본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일본의 역사가들은 1945년 이후 한국인이 광산업 등의 일본 산업에 강제 동원된 역사에 대해서
독자적인 연구를 해 왔다
일본 역사가들의 보수적인 추산으로 약 8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오늘날 문제가 발생했다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과 해결책을 두고 대립 중이다
'사도광산'
사도광산은 근대 한일 역사를 잘 보여 주는 곳이다
일본 주요 섬인 사도섬에 있는 금광인데 1600년대 초부터 운영됐다
바로 이 광산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금을 채굴했다
또한 이곳으로 죄수, 노숙자, 부랑자, 이단자를 보내기도 했다
따라서 근대 한일 관계가 형성되기 이전의 노동 환경도 잘 알려져 있다
1896년 메이지 정부는 미쓰비시의 사도광산 인수를 허가한다
여전히 대기업인 미쓰비시는 일종의 정부 협력 기업으로 봐야 한다
이 금광은 한국에서 잔혹 행위가 벌어졌을 때도 계속 운영됐지만 여전히 일본인 중심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말, 일본의 야심은 한국에만 머물지 않았다
태평양을 차지하려 했고 1938년 무렵에는 중국을 정복하려 한다
그 결과 일본 전역에서 남성 노동력이 크게 감소했다, 이 시점에 한국인이 강제로 징용됐다
1939~45년 일어난 일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대략 1,200명의 한국인이
사도광산에서 강제로 노동했다
오늘날 이들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1868년에서 그 역사를 멈추려 했다
여기서 역사의 무기화를 논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역사가 어째서 정치 문제가 됐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문제가 심각해진 건 강제노동을 비롯한 역사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일본은 독일처럼 못 하느냐, 왜 아직까지 책임을 인정하지 않느냐 말한다
몇몇 사건들로 이런 역사를 축소하려 들지만 사실 피해자가 상당히 많다
미국인으로서 이러한 '역사 전쟁'과 '기억 싸움'에 책임을 느낀다, 미국은 일본 정부에 이렇게 말한 셈이다
"걱정하지 마, 그 역사는 앞으로 우리가 계속 묻어 줄게"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1950년 논의 시작, 52년 발효
이 조약은 사실상 일본의 책임을 면제했다, 이후 UN이 반인도 범죄로 규정한 범죄에 대해 말이다
이 조약은 일본이 극동국제군사재판의 판결을 수용하는 걸 전제로 한다
극동군사재판(1946~1948): 제2차 세계대전 중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를 심판하기 위한 군사재판
하지만 미국은 일본을 포섭해야 했기에 독일과 달리 일본의 배상금 지급을 면제해 준다
즉, 새로운 불평등 조약 때문에 갈등이 싹튼 것이다(일본이 붕괴한 직후에)
미국이 전후 세계 질서에서 일본의 역할을 정해 뒀기 때문이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
한국과 일본 간의 국교 정상화 조약
서울과 도쿄의 정부는 거의 15년 동안 역사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은 갑자기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원했다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를 꿈꾸게 된 건
일본 제국주의에 대응해 공산주의가 팽창했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현재에만 집중하면서 다들 화해하고 과거를 잊길 바랐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극심한 고통과 분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잊고 나아가자'라고 말하며 정직함과 존엄성을 저버린 탓에 오늘날의 동북아시아
역사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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