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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지식 사이

EBS 위대한 수업2(한일 근대사) 1강~3강 요약정리

by 상팔자 2023.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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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위대한 수업2(한일 근대사) 1강~3강 요약정리

 

위대한 예순네 번째 강연 '한일 근대사'(시즌2 스물 두 번째)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역사학과 교수

2015년 만해상 수상

 

 

 

 

 

1강  페리 원정과 강화도 조약

 

-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 1875년 운요호 사건

    두 가지 중요한 키워드 → 독립(Independence) / 치외 법권(Extraterritoriality)

    치외 법권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체류하는 국가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

    '치외' 라는 단어는 국외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일본의 한국 강점 과정에서 치외 법권은 어떻게 생겨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수반됐을까?

 

    1863년 고종 즉위

    1860년대 조선 왕실에서는 커다란 음모가 벌어졌다, 왕실은 불안했다

    당시 지도자 중 하나였던 대원군은 아들의 섭정을 맡았는데 그의 아들은 왕이었지만

    왕좌에 앉기에는 너무 어렸다

    게다가 중전 민씨 가문과 대원군 사이에 권력 싸움이 일어났다

    한국의 통치자들은 외세가 개입해 권력과 정치를 좌우하기에 딱 좋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 1860~70년대 펼쳐지고 있었다

    미국 상선이 평양에 침입하려 하기도 했다, 그 배는 평양에서 불타버렸는데

    함장이 해도를 숙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 극동 확장도 큰 우려를 자아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외세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의 조공국이었다

    또한 일본과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였다, 일본은 수백 년간 도쿠가와막부 시대였는데

    이는 단순히 교역과 교류를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부산에 '왜관'이라고 불렸던 장소가 있다, 소규모 교역을 위해 대마도 영주가 관리하던 곳이다

    하지만 사실상 한국과 일본은 외부와 단절된 상태였다

  

  · 1853년 페리 원정

    1850년대, 미국 군함은 일본 영해에 진입해 강제로 무역을 개방한다

    결정적 원인은 미국이 얻을 커다란 이익 때문이었다

    미국은 일본 항구에서 담수를 구하거나 군함이 곤경에 처할 시 대피할 장소를 마련하려고 했다

    1850년대, 미 해군의 압력으로 일본이 문호를 개방했을 때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중국과 달리 일본 지도자들은 국가의 방향을 바꿔 유럽과 미국이 주도하던 권력 정치에 따르기로 한다

    하루 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미 일본엔 내분의 조짐이 있었다

 

    쇼군을 타도하고 일왕의 권력을 수복하려던 세력들이 지위를 두고 수십 년째 다퉈왔다

    당시 한국에서 벌어지던 사회적 갈등과 유사하다

    1858년, 일본이 미국의 통상 요구에 응했을 때 지도자들은 국제 권력 정치의 언어를 익히기로 했다

    바로 국제법이다 → 동아시아에 새로운 어휘가 도입된 순간이다

    독립(Independence)자주권(Sovereighty)은 일본이 20세기의 대제국으로 거듭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바로 이 순간 아시아 역사가 조금 달라졌다 

    지금도 '중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중국은 이 지역에서 소통하는 용어마저 결정했다

    한국어로는 '한자', 일본어로는 '간지(かんじ)'라고 한다

 덕분에 말로 소통할 수는 없어도 '필담'을 나눌 순 있었다

    사절들은 조약 협상 시 글로써 의견을 표명했다

 

    미 군함의 등장으로 일본인들이 깨달은 것은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인, 프랑스인, 미국인이 쓰는 언어를 배워야 일본의 식민지화를 막을 수 있다는 거였다

    무슨 간계가 있던 건 아니다

    세계의 지식과 권력을 참고해 일본 지도자들이 내린 결정일뿐이다

    흥미롭게도 일본은 즉시 국호를 바꿨다, '대일본제국'이 되는데 대영제국을 의식한 이름이다

    이후 일본의 지도자들은 그 방향성을 강화하고자 전 세계로 사절단을 파견한다

    중앙은행, 철도 같은 근대 문명의 요소들을 도입한다, 그들은 문명이라는 단어를 도입한다

 

    동아시아는 오래전부터 문명이 존재했던 곳이다

    근대적 언어로 이를 규정하는 새로운 단어가 생겼을 뿐이다

    1875년 <문명론의 개략>이라는 중요한 서적이 일본에서 출간된다

    저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국의 수많은 젊은 문명개화론자들이 중요하게 참고하는 인물이 된다

    '문명'이라는 단어가 도입될 당시에는 군사력 또한 중요했다

    민족의 탄생에 관해 생각해 보면 나라의 두 가지 근간은 '교육''군대'를 중심으로 한다

    그로써 '국민'이 등장한다

    한국어를 함께 배우며 한국인이 생겨나고 군대를 함께 만들며 한국인이 탄생한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 원인은 미국인들이 등장했을 때 일본 지도자들이 국가적 위기에 대응한 방식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국가에서 민족이 탄생한다

    일본은 1889년 아시아 최초로 헌법을 제정한다, 또한 정치 및 경제 체제를 재편했다

    이때 일본은 의식적으로 런던, 파리, 베를린, 워싱턴을 참고한다

    일본인이 중국인이나 한국인보다 현명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판단일 뿐이다

    지도자들이 위협을 인지하고 어떻게 스스로 지킬지 판단한 것이다

    중국이나 한국은 이처럼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여기서 논하고 싶은 사건 혹은 역사적 순간이 있다

    1875~76년 있었던 운요호 사건강화도 조약은 일본 개항 당시 메튜 페리가 펼친 전략을

    일본이 의식적으로 모방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강화도로 군함을 보낸다

    군함은 해안에 가까이 다가갔는데 한국인들이 준비해 둔 대포에 맞아 손상될 만큼 가까웠다

    국제법에 따르면 일본은 방어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공격한다

    그 결과 그레이트 게임, 권력 정치, 제국 건설 같은 그 당시의 국제적 용어에 기대며

    일본은 한국에서 영향력을 굳히기 위한 방법을 깨달았다

    우선 한국 통치자들과 중국 간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

    이 조약은 자칭 '수호 통상 조약'이었다, 미국이 일본에 강요하던 것과 같았다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도 일본에 강요했었다)

    이러한 세심한 작업을 통해 일본은 영해 밖으로 관심 범위를 넓히고 아시아 대륙 본토에 발판을 마련한다

 

    당시 일본인들은 1930년쯤 만주를 정복할 거라고 확신했을까?

 

    그러기엔 준비가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신중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일본이 어떻게 중국의 권력을 몰아낼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었다

    또 일본이 어떻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지도

 

 

 

 

2강  청일전쟁의 결과

 

 

-  한국을 둘러싼 근대전쟁

 

  ·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한국인들이 당시 정세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신문에 실리지 않았을 뿐이다(아직 신문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국 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이후 '독립협회'를 형성하는 몇몇 젊은이들

    일본의 행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깨닫는다

    (일본인들이 영국, 미국, 프랑스를 살펴보기로 한 것과 같다)

    당시 서울에서는 내분과 음모, 왕을 둘러싼 권력 다툼이 있었고 몇몇 청년들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이 어떻게 외세를 막는지 연구해 봐야겠어"

    그렇게 한국 청년들이 일본 유학길을 나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근대 관계를 돌아보면 늘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김옥균 같은 인물들은 게이오 의숙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와 함께 공부하며 문명과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배웠다, 이를 한국에 도입하려 했다

    한국인들이 이전과는 다른 지식을 얻어 자신을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인식하길 바랐다

 

    하지만 당시 현실을 보면 세계열강들은 일본의 권력을 없애는 데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인종 정치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왜냐하면 영국, 미국, 프랑스가 일본을 '아시아의 백인'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아시아 문명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자나 제국 건설자들이 의식적으로 자신들이 해외 활동을 그런 식으로 묘사하면서

    '문명화 임무'를 수행한다는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게 일본의 책무라는 언어를 사용해 거대 제국을 설계하고 아시아를 점령했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한국을 중국과의 전통적 관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가 싹튼다

    또한 한국이 독립국이라는 인식을 형성하려 했다, 한국은 주권과 권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하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의 문제점은 일본인은 한국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치외 법권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일본이 제국 건설 초창기에 구상했던 방어 전략은 '정한론'과 관계가 깊다

    이는 한국을 정복하자는 1871년의 논의였다

    당시 메이지 정부에 소속된 일본 정치인 다수는 지위를 박탈당한 사무라이였다

    관료가 된 후로 입지가 흔들렸는데 사무라이 제도가 있던 도쿠가와막부 시대의 권력을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은 일본의 위세를 확장하려 한다, 그 계기는 한국 왕에게 모욕을 느꼈다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1871년 모욕을 느낀 일본 정치가들은 한국을 정복하자고 했다

    하지만 그 시기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해 유력한 젊은 일본 정치인들은 '이와쿠라 사절단'에서

    전 세계를 견학 중이었다

    세계의 권력 중심지를 시찰하던 그들은 고국에서 한국 정복을 논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몇몇은 여행을 중단하고 급히 도쿄로 돌아가 말한다

    "안 됩니다. 군사적으로 우릴 노출하면 우리가 정복당해요.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

    그들은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군사 훈련을 지켜봤고 영국과 미국에서 싹트던 산업 체제를 목격했다

    일본이 존재감을 드러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일본이 단계적으로 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 인디언 전쟁'에 참전해 미국을 정복한 이들까지 고용했다

    일본은 내부에서 식민화를 먼저 시도했고 홋카이도를 일본 최초의 식민지로 삼았다

    한국과는 달리 내부 식민지였다

 

    당시 한국은 여전히 중국을 섬기면서 중국과의 조공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국부로 여겨지는 이토 히로부미와 오쿠마 시게노부 등이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말했을 때

    해외에 일본의 위대함을 알리려던 사람들은 실망했다

    이러한 한일 관계의 시초에서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일본의 식민화 작업

    일본을 구하기 위한 방어적인 노력에 가깝지 처음부터 한국 점령을 노린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은 서양이 그러한 행보를 용인할지 확인하려 했다,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을 식민화하는 것을 미국과 영국이 용인할지 말이다

    

    결국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1894-95년 첫 근대 전쟁을 벌인다

    일본이 중국을 꺾는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김옥균(1851~1894)을 어떻게 평가할지도 문제이다

    김옥균을 훌륭한 개혁가로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김옥균은 일본을 오가며 온갖 여행을 했고 도쿄 남쪽에서 1,000km 떨어진

    오가사와라 제도에 몸을 숨긴 적도 있다, 그는 일본의 성공 전략을 적극적으로 배우려 했다

    중국을 방문해 일본을 대신해 중국과 협상할 방법을 궁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일본에 너무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망을 받아들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동포에게 암살된다

    김옥균의 암살이 흥미로운 이유는 일본 정부가 김옥균을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인으로 평가하며

    그 암살 사건으로 첫 근대 전쟁을 정당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1894~95년에 있었던 청일전쟁 말이다

    그들은 김옥균의 복수를 위해 중국을 공격한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근대 초창기에 일본이 벌인 전쟁들의 명칭이다

    청일전쟁부터 10년 후의 러일전쟁까지 이 전쟁들은 사실상 한국에 대한 통제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다

    하지만 이름에서 한국을 지워버렸다

    이름은 청일전쟁이지만 승전국은 한국에서 더 큰 권리를 행사한다

    일본은 중국을 꺾음으로써 그러한 보상을 얻는다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중국은 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

    이건 일본의 반사적이며 방어적인 제국주의 행보이자 그레이트 게임의 흐름을 답습한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중국을 끌어내렸다, 또한 시모노세키 조약이 중요하게 시사하는 점이 말미에 드러나 있다

 

    "일본어와 중국어 사이에 혼동이 발생할 경우 영어 번역을 기준으로 한다"

 

   

    이는 아시아의 권력 정치에 영어가 개입된 최초의 사례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외교 조약이나 최종 법률 문서는 영어로 작성된다

    필담이 수백 년간 이어져 왔고 중국이 지식과 권력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일본은 중국의 그런 역할을 박탈한 셈이고 이건 군사적으로 중국을 꺾은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렇게 일본은 1895년 무렵 언어와 권력의 융합을 이뤘다

    한국이 개혁을 코앞에 둔 순간이었다

 

  ·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 시기 한국의 개혁가들은 새로운 민족의식을 형성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했고 고종을 황제로 격상했다

    이처럼 한국 내에선 변혁의 열기가 뜨거웠다, 개혁가들이 지도자들을 일깨웠다

    민족주의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이다

    일본이 군사 점령 조치를 강화할 테니까

 

 

 

 

3강  포츠머스 조약과 헤이그 특사

 

 

- 열강의 전략을 답습한 일본

 

  · 한국은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포고했는데 일본은 이를 지우려 했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은 중국(청)을 한국(조선)의 종주국 위치에서 몰아냈다

    한국은 국제법상 독립국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 조약으로도 중국 본토에 발판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도쿄에서는 아직 세계가 일본을 열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동시에 중국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오늘날의 포스터와 같은 목판화를 팔았는데 중국에 대한 일본의 승전을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의 주요 도시의 모든 상점에서 팔았다, 자국이 강하다는 인식이 일본인 사이에 형성되고 있었다

    중국을 꺾었으니까 말이다

    1895년 '삼국간섭'을 통해 유럽 3개국은 일본에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우리만큼 문명화되지 않았으니 중국에 있는 항구를 차지할 수 없어"

    "한국은 가져도 돼 한국은 독립국이니까"

    "알지? 입김은 불어도 되지만 중국은 발 딛지 마"

 

    당시 아시아와 세계사를 보면 중국은 유럽 열강의 전리품이 되어 분할되는 중이었다

    열강들은 아직 일본을 끼워줄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 정계의 강경한 팽창주의자와 군국주의자는 군사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특히 한국에서

    그래서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과 협력하기 시작하는데 일본의 이해관계를 한국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려 했다

    또 일본이 국제 열강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굳건히 하려 했다

 

    1901~02년 무렵 일어난 이 일은 한국사의 비극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 개혁가들이 흥미롭고 중대한 변화를 한국 사회에 도입 중이었다

    신문 창간 / 새로운 교육 제도 / 양반 및 귀족 제도 철폐 / 노비 제도 불법화

    즉, 한국을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을 때 

    일본은 강경한 행보를 통해 열강으로 자리 잡기로 결심하고 군사적 수단으로 그 목표를 이루려 한다

    결국 미국의 승인을 받아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로 1904~05년 전쟁을 벌인다

 

  · 1904년 러일전쟁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일본이 러시아를 이겼기 때문이다

    1880~90년대 유럽에는 인종 차별적 표현이 있었는데 일본인을 백인에 가깝다고 여겨

    다른 아시아인과는 다르다고 인식했다

    1905년 러시아를 꺾으며 일본인은 '아시아의 백인'으로 평가받게 됐고 새로운 권력 정치가 국제적으로 도입된다

    1905년 여름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은 러시아를 꺾은 대가로 한국을 넘겨받게 된다

 

  · 1905년 포츠머스 조약

    1905년 여름에 러시아와 일본 정부의 대표들은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미국 관료들과 만났다

    한국은 자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주권이 약화된 순간이다

    10년 전부터 권력 정치에서는 국제법의 언어가 중요해졌다

    그런데 일본은 이미 10년 전에 아시아에서 한국의 독립을 확고히 했다

    즉 전통적인 권좌에서 중국을 밀어냈다

    10년 사이에 더 강력해진 일본은 오늘의 G7에 빗댈 열강의 반열에 들기로 한다

    열강들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당대 식민 정치에서 한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근대 한일 관계를 논할 때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일본의 한국 점령을 전 세계가 지지한 이유는 다른 국가들도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했을 때 다른 국가들도 미국, 영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요컨대 미국은 한국과 필리핀을 교환했고 영국은 미얀마와 한국을 교환한 셈이다

 

    ☞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불법이다, 일본의 불법 행위다

          문제는 일본이 열강의 전략을 답습했고 열강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벌인 행위를 유럽의 수도와 워싱턴에 납득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독립과 주권이라는 용어가 일본 제국 건설 단계에서 굉장히 중요해진다

 

    한국인들이 그저 좌시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 한국 청년 상당수가 국제 사회에 항의하려고 했다

    '안돼. 우린 국가야 어엿한 독립국이라고!'

 

  ·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은 세 명이 청년을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것이다

    특사들은 미국에도 갔다, 대통령 만나려 했지만 그는 면담을 거부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 미국의 제26대 대통령)는 제2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데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 포츠머스 조약을 중계한 공로였다,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할 때였다

    만약 한국 사절들이 목표를 이뤘다면 제국 건설의 질서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그 회의장에 모인 대영제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국의 언어는 당대 한일 역사에 있어 근대 국가로 거듭나려던

    한국의 노력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다

 

  · 1907년 대한제국군 해산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데 이어 한국의 재원을 빼앗았고 1907년에 한국군을 해체했다

    교육과 근대식 군대는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군을 해체했다

    안타깝게도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힘든 시기기도 했다

    1907년 경엔 한국 정세에 세계는 관심이 없었다, 일본이 한국의 지방을 탄압하기 시작했을 때 말이다

    이로써 일본의 통치자들은 확실히 깨닫는다

    "한국을 점령해도 괜찮다, 유럽이나 미국은 항의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폭력의 수위를 높이고 어떤 한국인 관료와 손을 잡을지도 파악한다

    1907년 일본은 굴욕을 당했다, 헤이그 특사 3명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을 때

    그 사건이 국제 언론에 보도됐다

    일본 관료들은 격분해 고종 황제에게 새 칭호를 붙인 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아들인 순종을 왕위에 올렸다

    고종 황제를 강등함으로써 일본 천황보다 격하한 것이다

    또한 더 큰 의도를 지닌 채 한국의 지방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군사력을 견디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국은 순식간에 점령됐다, 점령의 마지막 순간은 한국의 영웅에 의해 촉발됐다

    남북한 모두의 영웅인 안중근(1879~1910, 한국의 독립운동가)에 의해서

    그는 식민지 관리를 위해 파견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이토는 하얼빈을 순방하던 중이었는데 안중근은 열차 승강장에서 그를 총격으로 암살했다

    일본 정부는 그의 암살에 매우 강경하게 대응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근대 일본의 조지 워싱턴으로 여겨졌고 일본 역사상 진정한 국가 건설자였다

    일본은 그의 암살에 대응해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초대조선총독)라는 군정 통치자를 파견하는데

    그는 서울에서 이런 선언을 한다,  "너희를 전갈 채찍으로 다스리겠다"

    아주 가혹한 무력 통치를 펼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국제적으로 한국의 존재를 말소하고 한국의 지방까지 침투한 결과이다

    일본의 지방 침투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은 저지됐다

    일본은 1910년 8월 이의 없이 한국을 점령한다

 

  · 1910년 한일병합조약   

    도쿄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축하했다, 국호는 '일본령 한국', '일본령 조선'으로 바뀌었다   

    1960년에 러시아를 꺾고 1910년에 세계열강으로 나설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더는 한국이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은 대일본 제국의 일부가 됐다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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