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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지식 사이

EBS 위대한 수업 4 하타노 스미오 (일본의 전후 역사 인식) 1~4강

by 상팔자 202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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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위대한 수업 4 하타노 스미오 (일본의 전후 역사 인식) 1~4강

위대한 백서른 아홉 번째 강연 '일본의 전후 역사 인식' (시즌 4 열아홉 번째)

 

 

하타노 스미오 (Hatano Sumio)

츠쿠바대 일본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일본 외교 문서 편찬 위원회 위원(2009~)

일중 역사 공동 연구 일본 측 위원(2006~2009)

일본 학술회의 정치학 연구 위원(1995~1998)

 

 

 

 

(2025. 02. 11. 방송)

 

1강  195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한일, 중일 간 역사 문제의 가장 큰 원인

 

1951년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태평양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일본의 국교를 회복하고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국제 협정으로 전쟁 상태였던 48개국과 체결한 조약이다

 

이 강화조약은 당시 일본을 점령했던 미국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고 1950년 6·25 전쟁(1950년 발발)이

한창일 때 체결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있다

 

"alt":"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내용 중"

 

예를 들면 영토는 독도 등 일본 주변 섬들에 대한

포기가 규정되어 있지만 각 영토의 귀속국은

강화조약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 결과 독도와 쿠릴 열도는 한일, 러일 간

분쟁의 씨앗이 됐다

 

이건 미국의 조약을 담당했던 존 덜레스의

의도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국가 분쟁을 예상하면서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분쟁의 소지가 있는

조약을 만들게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일본의 패전 직후 연합국이 작성한

강화 초안은 일본 재침략의 싹을 자르기 위해

매우 엄격하게 작성됐다

이를테면 미국 정부가 1947년에 작성한 초안은

일본 군국주의 부활 저지를 최대 목적으로 했다

전쟁 책임, 전범 처벌 재판, 군대 보유 금지, 경제활동 제한 등

엄격한 배상 의무 등의 조항이 나열되어 있다

 

※ 얄타회담(1945): 독일 패전과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회담

그건 냉전 시대 이전의 얄타회담을 전제로 한 규정이

나열된 '처벌적 평화'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아시아로 확대되면서 처벌적인

조약의 방향이 변해갔다

미국의 세계정책이 소련 공산주의 확산 방지에 집중됐고

전략적 요충지로서 독일과 일본이 주목받게 됐다

 

그리고 6·25 전쟁의 발발은 미국이 일본을 자유 진영으로

정착시키겠다는 온건파 노선을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점령 정책이 온건파 노선의 영향을 받아

전쟁책임과 배상 문제에서 일본에 관대한 방향으로 변화했다

그래서 전쟁책임이라는 문제가 모호해지고 말았다

 

20세기에 체결된 평화조약 협정들을 보면

1919년, 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베르사유 조약

1946년, 2차 세계대전 후의 파리 평화 조약 협정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했다

 

"alt":"전후 책임 처리"

 

이에 반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전쟁책임이

일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어디에도 명시하지 않았다

전쟁책임과 관련된 내용은 강화조약 제11조에 쓰여 있는데

'국제 군사재판 판결을 수용한다'고만 적혀있다

 

"alt":"샌프란시스코 조약 제11조 중"

 

즉, 1948년에 완료된 도쿄재판과 아시아 각지에서

진행된 군사재판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일본 정부의 의무로 규정한 것이다

제11조의 규정은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 극동국제군사재판(1948)

: 일명 도쿄재판, 일본 주요 전쟁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한 국제 재판

그중 하나는 도쿄재판에 기소된 28명의 피고인

특히 교수형에 처한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지도자에게만

전쟁책임을 지게 하는 '지도자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도쿄재판 등의 판결

즉, 종신형, 교수형과 같은 평결만을 받아들임으로써

대외적으로 일본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도쿄재판의 판결문은 일주일에 걸쳐 법정에서 낭독되어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침략전쟁임을 분명히 했다

 

"alt":"도쿄재판의 판결문 내용 중"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 판결문의 침략 전쟁론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즉, 태평양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도 같은 입장이다

또한 국가 원수인 일왕의 전쟁책임 문제

강화조약이나 도쿄재판에서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은 것도 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논의를 방해한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일왕의 전쟁책임을 추궁하기로 한 건

연합국 측이었다

연합국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왕의 전쟁책임을

추구하려고 했고 특히 미국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의 점령군,

즉 미국 정부는 결국 1946년 4월, 일왕을 전쟁범죄인으로서

도쿄재판에 기소하는 것을 포기했다

포기했다기보단 그만둔 것이다

 

일왕을 이용해 일본에 대한 점령 정책을

원만하게 진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왕에게 전쟁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정부는 도쿄재판이 끝난 후 B급, C급 전범

석방에 힘을 쏟았고 그 결과 전범형을 받은 군인은

'공무상 사망'으로 인정받았고 일반 군인과 마찬가지로

연금이 지급되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되었다

A급 전범으로 형을 받고 사망한 지도자들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됐다

 

그러면 전쟁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전범들의 '죄'는 무엇인가?

일본 국회에서 전쟁책임이 문제가 된 것은

조약 체결 후 30년이 지난 80년대였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역사 교과서 문제가

대외적으로 부상했던 때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침략전쟁이냐 아니냐는 질문에

한국과 중국의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대답할 뿐

침략전쟁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본 사회에선 일부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일본 국민은 피해자일 뿐이라는

의식이 강해졌다

일본의 언론도 국민도 아시아 침략의 가해자라는

인식은 가지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또 다른 문제

원칙적으로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이 작성한 초안에는 일본이 끼친 피해에 대해

연합국 측은 배상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여기엔 일본의 경제 부흥을 위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됐다

필리핀 등 큰 피해를 본 동남아 국가들은

배상 포기 조항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전쟁배상금'에 관한 조항에 이런 내용이 있다

 

"alt":"전쟁배상금에 관한 조항 내용 중"

 

일본의 지급 능력을 고려하여 배상액을 결정한다

원칙을 내세웠는데 일본의 무역과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내용이었다

국가별로 진행한 배상 협상은 양국 간 입장차이로

난항을 겪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배상 협상을 매듭지었고

결국 동남아 국가 등에 약 1조 엔 정도의 배상금을

지불하게 됐다

 

국민 1인당 약 5천 엔 이하로 일본 경제엔

큰 부담이 되진 않았다

이 배상금은 상대국의 경제 발전을 돕는 투자라는

개념과 일본의 자금 협력의 형태로 이뤄졌기 때문에

상대국의 경제적 이익 측면에서 어느 정도 만족감을 주었다

하지만 전쟁배상이란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손실에 대한

보상이라는 의미인데 그런 전쟁배상의 의미가 상실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모든 연합국이

참가하지 않았다

일본의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방식 때문에

참가를 거부한 동남아 국가들부터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도 서명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과 같은 국가들이

서명하지 않은 것은 큰 문제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1952년 중화민국과의 중일평화조약 

1956년 일소공동선언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한일 청구권 협정

1972년 중일공동성명이 양국 간 합의가 이뤄졌다

1952년 중일평화조약에서 타이완 정부는

배상받는 것을 포기했고 일본 정부는 법적으로

중국과의 배상금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협상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피해는 대륙이 입은 것이다

장제스가 포기했으니 괜찮다는 생각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

이는 중국에 대한 모욕이다"

그는 일본 측의 해석을 강하게 비판했다

 

즉,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은 중국의 배상 포기 방침을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과 반성을 전제로 하고

역사 인식 문제와 배상 포기를 함께 묶어서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국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양국 협상 이후 일본이 중국에 대규모 공적개발원조를

지원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전쟁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강화조약을 기초로 한 양국 간 합의의 공통된 특징

국가도 개인도 '모든 청구권의 상호 포기'라는 원칙이

관철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적으로 피해자 '개인'은 가해국 '일본'에

더 이상 손실이나 피해를 청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개인 즉, 국민의 피해와 손실을 국가에 포함시킨

'일괄 처리' 조처인 것이다

 

이는 한일, 중일 간의 역사 문제 해결에 큰 장벽이 된 셈이다

한국의 경우 또 다른 장벽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목적은 전쟁에 따른 피해보상일 뿐

식민지 지배의 피해 보상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은 '전승국'의 입장으로 한일 협정에 임하려 했습니다만

한국과 일본이 전쟁한 건 아니라는 이유로

미국과 영국에 의해 거부당했고 1952년부터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일본이 한반도에 남긴 국유, 사유 재산의 처분 등이

'청구권' 문제로 난항을 겪는다

다시 말해 일본의 패전은 동시에 식민지 제국의

해체를 수반했기 때문에 화해 과정에서 식민지에 대한

조치가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에 있는 일본 재산 처리, 재일한국인의 처우,

국적 문제 등이 오래도록 양국 간의 깊은 응어리로 남게 되었다

 

 

 

 

 

 

(2025. 02. 12. 방송)

 

2강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이 골머리를 앓는 역사 문제

 

첫 번째는 1980년대 외교적 문제가 된 

역사 교과서와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이다

일본 역사 교과서의 경우 교과서의 내용이

문부성의 검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이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두 번째는 위안부 문제나 강제노동과 같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상 방안 문제이다

 

첫 번째 문제의 배경에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이 있지만 

문제의 성격에는 차이가 있다

역사 인식의 반성이나 수정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다투는 게 아니라는 것이 특징이다

서로 사용하는 용어의 차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쉽게 여론이 뜨거워지거나 쉽게 식는

경향이 있으며 큰 운동이 촉발되는 경우도 있다

 

두 번째 문제는 피해자 '개인'과 관련이 있다

개인이라고 표현했지만 관련 기업이나 단체도 포함한다

개인에 대한 배상, 사죄, 책임 등 구체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1990년대 이후 외교 문제가 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강제노동, 원폭, 세균전 피해자를 위한 '전후보상'

문제들이 해당된다

 

※ 야스쿠니 신사

:  A급 전범 14명을 비롯해 강제로 전쟁에 동원됐던

한국인 2만여 명 등이 합사 되어 있는 민간 종교시설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총리는 전후 총리로서

처음 공식적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그전까지는 각료의 참배가 합헌이냐 위헌이냐는 건

일본 국내 문제였다

나카소네 총리의 경우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는 참배라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정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중국의 반발을 초래하게 된다

 

9월 말 중국 인민일보에선 침략전쟁의 책임자인 A급 전범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며 총리의 공식 참배는

전쟁의 책임을 희석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실형을 받은 A급 전범이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된 것에 반발한 것이다

합사란 일왕의 이름 아래 싸웠던 전쟁이나 사변의

전사자를 한 명 한 명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메이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종교의식으로 합사된

총 246만 명 중 90% 이상이 태평양 전쟁의 전사자이다

 

나카소네 이후 10년간 총리, 외무장관 그리고 관방장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공식과 비공식의 구분 없이 중단되었다

고토다 마사하루 관방장관은 이렇게 주장했다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이 도쿄재판의 판결을 받아들인 사실을

감안하면 공식 참배를 우려하는 상대방의 감정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공식, 비공식 참배를 중단하도록 당 유력 인사들과

각료들을 설득했다

 

80년대 나카소네 정권 시절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포기,

교과서 수정 등 국내 우파 세력에 맞서 중국과의 원활한

관계 유지를 우선시했다

특히 한국과의 관계에서 한일 전략적 협력을 우선시하는

나카소네의 강력한 리더십이 역사 교과서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민감한 역사 문제의 확대를 막았다

 

그런데 총리의 참배가 다시 큰 문제가 된 건

2001년부터 시작된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였다

2001년 4월, 새 내각을 출범시킨 고이즈미 총리는

종전 기념일엔 참배한다는 공언대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부활시켰다

다만 자민당의 연립 여당인 공명당과 예정된 방중 방한에 대한

외무성의 우려 등을 고려해 이틀 앞당겨 8월 13일에 참배했다

참배 후 고이즈미는 이렇게 말했다

"전사자들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바치며

다시는 그런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맹세를 되새겼다"

"A급 전범이나 특정 개인을 참배한 것은 아니다"

 

외교 당국은 참배 일정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중국과의 정상회담을 하루빨리 성사시켜

양국의 반발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해 10월, 중국에 이어 한국을 방문한 고이즈미 총리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에 앞서 식민지 지배로 인한

고통과 피해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한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2001년 10월 고이즈미 총리 서대문 국립공원 방문

"일제 식민지 지배로 인한 한국인의 아픔에 대해 참회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곳을 둘러봤습니다"

김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는 1998년 한일 공동선언을 준수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 내외국인이 납득할 수 있게

평화의 기도를 하는 방법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고이즈미와 김 대통령은 10월 하순에 상하이에서 다시 만나

한일 역사 공동연구 추진과 대체 추도시설 검토회를

조속히 발족하기로 합의했다

 

한국과 중국은 더 이상의 참배는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이후에도 매년 참배를 계속했고

마지막 6번째 참배는 2006년 종전 기념일이었다

종전 기념일에 총리로서 참배한 건 나카소네 총리 이후

21년 만이었다

연립여당인 공명당과 외무성 간부의 참배 자제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중국과의 정상 회담이 중단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2002년 10월 멕시코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때

장쩌민 주석은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13억 중국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문제라며

고이즈미 총리에게 자중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다신 전쟁을 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참배하고 있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고이즈미 총리에게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신념의 문제였고 그것과 대외정책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정상회담 때마다 대체 추도시설의

건립을 요구했다

김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의 합의에 따라

2001년 12월, 정부는 후쿠다 관방장관의 자문기관으로

간담회를 발족했다

그리고 약 1년간의 검토를 거쳐 야스쿠니 신사의

존재 의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대체 시설을 용인한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대체 시설 설립을 두고 일본 정계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지하는 국회의원 그룹은

대체 시설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의결문을 채택하고

260명 이상의 초당적 여야 의원들의 서명을 받았다

한편 대체 시설 설립에 찬성하는 그룹은 2005년 10월

초당파 의원 모임을 발족해 이듬해까지 100명을 모았다

자민당의 전 부총재였지만 친한 계열의 야마사키 타쿠가

총괄을 겸직했다

 

양측의 대립은 포스트 고이즈미의 후계자 경쟁으로 이어졌다

유력한 후보는 아베신조와 후쿠다 야스오로 둘 다

자민당 의원이었다

2006년 7월 20일 쇼와 일왕이 A급 전범 합사 때문에

참배를 피했다고 신문에 보도됐다

이로 인해 대체 시설의 문제는 총재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를 뻔했지만 보도 직후 후쿠다는 총재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 결과 2006년 9월 20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가 압승했다

 

이후 아베 총리의 한국과 중국 방문 일정이 발표되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예민한 두 나라로의

빠른 방문 일정은 한국과 중국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목적이기도 했지만 교착상태에 빠진 아시아 외교를

타계하기 위해 물밑에서 한중 외교당국과 대화를

지속한 외무 당국의 성과이기도 했다

 

2006년 10월,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원했던 아베 총리는

취임 직후 중국을 방문했다

일본 총리로서는 5년 만의 방문으로 '얼음을 깨는 여행'

이라고 했다

양국 외교 당국의 판단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2008년 5월에는 후진타오 주석이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했고

양국은 전략적 호혜 관계를 추진한다는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일본 측은 중국의 발전이 국제사회에 좋은 영향을

가져다준다고 했고 중국 측은 전쟁 후 일본의

평화 국가로서의 행보를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2012년 12월에 제2기 정권을 출범시킨

아베 총리는 연립정당인 공명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총리의 참배는 고이즈미 총리 이후 7년 만이었다

 

일본의 국내 여론은 찬반이 엇갈렸지만

대외적으로는 한국과 중국은 물론 EU와 싱가포르에서도

강한 비판을 받았다

특히 미국의 반응이 두드러졌다

주일 미국 대사관은 즉각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지도자가 주변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행동을

한 것에 실망했다"

 

거슬러보면 이건 연합국최고사령부(GHQ)의

지령에 따른 결과이지만 A급 전범을 포함한

전사자를 추모하는 중대한 문제에 국가가

개입하지 못한 채 종교시설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시킨 것이 오늘날의 이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2025. 02. 13. 방송)

 

3강  일본군 '위안부' 전후 보상 문제

 

 

 

 

전후 보상 문제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 중국의 피해자가 개인 보상을

요구하며 일본 법원에 제소하는 경우가 급증했다

※ 전후 보상: 가해국이 피해자 개인에게 행하는 피해 보상

법적 구제라기보다 도의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사안이다

전후 보상 문제 중에서 위안부 문제는 상징적이고 대표적이다

 

1991년 12월, 한국 여성 단체의 후원을 받은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세 명이 일본 정부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도쿄 고등법원에

소를 제기했고 이는 곧 한일 갈등으로 이어졌다

다음 해인 1992년 1월 11일, 아사히 신문

1면 머리기사로 일본 방위청에서 발굴한 일본군의

개입 자료를 보도했다

 

이 보도는 지금까지의 일본 정부의 견해를 뒤집고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관리 통제에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자료였고 이로 인해 한국은 진상 규명과

사죄, 배상을 한꺼번에 요구할 수 있었다

그해 1월에 방한한 미야자와 총리는 거듭 반성과

사죄를 전하고 본격적인 조사를 약속했다

 

1993년 8월, 미야자와 내각은 조사 끝에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 이른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의 결과 장기간, 그리고 광범위한 지역에

위안소가 설치돼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됐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_고노 요헤이 (당시 일본 관방장관)

 

고노 담화에서는 일본군이 관여를 인정하고

한국이 중시하는 강제성에 관해서는 

당시 한반도를 통치하던 일본이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이설로 속여 위안부가 총체적으로 본인 의지에

반하여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한국 정부도 강제성을 인정한 것으로 평가한

논평을 발표했다

그리고 1995년 종전 기념일에 발표된 무라야마 총리

담화는 전후 50주년 담화라고도 일컫는다

"과거에 식민지 지배와 침략 때문에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_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일본총리)

 

이 담화의 핵심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피해를 본 아시아 국민에게 진심 어린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총리를 비롯한 각료의 사죄와 반성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만 비공식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무라야마 담화는 임시방편적인 담화가 아니었다

정권 교체 후에도 계승되어야 할 정부의 의사를

직접 표명한 것으로 국가의사결정의 공식절차를 거친

담화였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내의 역사 인식을 통합시키진 못했지만

'침략전쟁인지 아닌지는 생각하기 나름이다'는 발언이나

'역사가의 해석으로 결정된다' 등의 발언은 각료들이

못 하게 만들었다

무라야먀 내각은 도의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했다

 

당시 무라야마 내각은 사회당, 자민당, 신당의

연립 정권이었다

국가 보상을 주장하는 사회당과 이에 반대하는

자민당이 대립했다

일본 정부는 자민당과 마찬가지로 개인에 대한

청구권 문제는 강화조약과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만큼 국가의 개인 보상은 불가능하다

입장을 취했다

※ 한일 청구권 협정(1965)

: 일본이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고

한국은 대일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에 합의한 협정

 

국가 보상을 둘러싸고 정부, 자민당과 사회당은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 결과 국가적인 보상(책임)은 부정하나

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 일본 국민들이 참가하는

국민 기금안을 제시했다

3당 협의에 따라 1995년 7월 무라야마 내각은

국민들의 기부금을 모아 정부가 함께 운영하는 형태로

아시아여성기금을 발족시켰다

 

아시아여성기금의 설립목표는 위안부에 대한

위로금 200만 엔 지급과 일본 총리의 사과의 편지였다

위안부 기금은 인도네시아, 필리핀에서는 긍정적인

평가 아래 실시됐지만 한국 위안부는 위로금 기급을 거부했다

결국 1999년 한국에서는 기금사업이 중단됐다

위안부 문제의 특징은 한일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적인 인권, 인도적 문제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유엔 인권위원회에서도 1993년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고 양국 조사를 근거로 1996년 인권위원회에

보고서가 제출됐다

 

"alt":"UN인권위원회 여성폭력문제 특별보고관"

 

보고서에서는 위안부를 '성 노예제도 희생자'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에 대해 법적 책임과 사죄와 보상,

관계자 처벌 등을 권고했다

또한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도의적 관점에서는

환영하지만 국제법상의 법적 책임은 피할 수 없다

지적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아시아여성기금으로

성실한 대응을 했다며 보고서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2007년, 미국에선 위안부 결의가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오늘 의회는 일본 정부에 위안부들이 겪어야 했던

치욕에 대해 공식적으로 명백하고 분명한 사과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_마이클 혼다 (캘리포니아 소속 하원의원, 일본계 이민 3세)

 

이 결의는 일본군이 아시아 여성을 성적 노예로 

삼았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일본 정부에 공식

사죄를 요구했다

이후 동종의 결의안이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EU 의회에서 채택됐다

 

반면 일본의 명예를 지키려는 보수 단체나 국회의원

위안부가 'Sexual slavery' 즉, 성노예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강제 연행을 인정한 고노 담화가

각국이 일본을 비난하는 가장 큰 근거라고 보고

고노 담화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문제들이 90년대부터 줄줄이 나타난 배경은

강화조약을 외부에서 지탱하고 있던 냉전이

끝났기 때문이고 일본의 자민당 체제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2010년 8월 민주당 정권의 칸 나오토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칸 담화는 식민 지배가 한국인의 의사에 반하여

이뤄졌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칸 담화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한국 정부의 입장과 상당히 가까운 해석을 한 것이다

이를 높게 평가한 한국 정부는 고이즈미 정권 때

중단됐던 한일 '셔틀 외교'를 재개했다

 

민주당 정권 당시에는 식민지 지배에 관한

역사 인식에서 한일 정부 간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진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피해자 지원 단체는 식민지 피해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이 없다며 즉각적인 입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후 민주당 정권이 막을 내리자 위안부 문제는

다시금 한일 관계의 쟁점으로 떠올랐고

격렬해진 반일 시위는 미국으로까지 확대됐다

2010년 10월, 미국에서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가

설치되었고 이후 '평화의 소녀상' 등 기림비가 

세계로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그 후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로 한일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한때 양국 관계는 단절

상태에 빠졌다

한국에서는 일본 정부를 피고로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에 관한 소송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국제법상의 주권면제 원칙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한국 사법의 판단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강제동원

재판에서 일본 기업에 원고인 한국인 피해자에게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에 의해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며 일본 기업을 고소한

한국인의 강제동원에 대한 확정판결이었다

"이런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주문,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상고 비용은 피고(신일철주금, 現일본제철)가 부담한다"

_김명수 (당시 대법원장)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원고의 개인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 한국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일본 정부는 곧바로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정부에 강력하게 대응책을 요구했다

"오늘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강제동원) 청구권 문제를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한일 청구권 협정에 분명히

위반할 뿐 아니라 일본 기업에 부당한 불이익을 준다고 봅니다"

_고노 다로 (일본 제145~146대 외무대신)

 

그 결과 한국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했고

일본 기업과 상점이 잇따라 문을 닫게 된다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한국인 관광객의 발걸음도

주춤해졌고 한일 간 일부 항공 노선은 잠정 

중단되기도 했다

 

한일 관계가 사법상 대립에 그치지 않고 

심각한 사태로 발전한 것이다

역사 문제를 둘러싼 마찰이 경제 영역까지

확대된 것이다

다행히 양국 정부는 통제 불가능한 분쟁으로

커질 위험은 피했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었다

 

그 후 2023년 윤석열 정권은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 원고에게 정부 산하인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기업을 대신해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방침을 공표했다

그리고 그 재원은 한국 민간 기업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고 밝혔다

일본 기업 혹은 일본의 협력을 요구하지 않은 점에서

기존 배상 방안과 달랐다

미국도 일본 정부도 이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지만

한국 내에서는 굴욕적이라며 반대하는 세력이 있어

배상안의 향방은 불투명해졌다

 

 

 

 

 

(2025. 02. 14. 방송)

 

4강  일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일본이 일으킨 역사 문제의 해결 방법

 

일본이 일으킨 역사 문제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즉,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느냐의 문제와

전후 보상 문제처럼 보상, 배상, 사죄와 같은

구체적인 피해자 구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당면 과제는 외교 문제로 되는 것을 억제

즉, 정치화하지 않는 것이다

 

♧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우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외교 문제로

번진 원인은 분명하다

도쿄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A급 전범 7명이

수백만의 병사와 합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 1 ☞  A급 전범의 분사

분사란 A급 전범 7명을 야스쿠니 이외의

시설로 옮기는 것을 뜻한다

해결책 2 ☞  국립 추도 시설 마련

이를 위해 종교적인 의미가 없는 치도리가후치

전사자 묘원에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전사자의 영령을

옮기는 방법도 여러 차례 검토됐다

 

※ 치도리가후치 묘원

: 민간 종교시설인 야스쿠니 신사와 달리 일본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묘지공원으로 고위급 전범이 아닌 무명용사와

민간인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음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 측은 분사나 새로운 시설

건설에 대해 한번 합사한 혼령을 분리할 수 없다는

종교적인 이유로 거절하고 있다

그래서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 이후 한국 정부는

일관되게 새 추도시설의 건립을 일본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해결책 3 ☞  총리와 각료의 참배 중단

일본의 많은 각료나 국회의원은 고이즈미 총리처럼

생각하곤 한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개인의 정서 문제이고

지도자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전사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자중한다고

하지만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은 야스쿠니 신사가 

종교색을 벗고 종교법인에서 탈퇴하여 국가지원을

받도록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유력 세력이 몇 차례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현되진 않았다

공무로 사망한 사람들의 추도 시설이 없는

현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일왕이나 외국 귀빈이 공식적으로 참배할 수 있는

추도시설을 희망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이를 위해 정치권이 움직여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국립 추도 시설을 건립해야 한다

 

90년대 이후 일본 정부는 강화조약 체제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화해 정책을 펼쳐왔다

무라야마 내각의 평화 우호 교류 계획과

아시아여성기금, 고노 담화부터 칸 담화

한일, 중일 간의 역사 공동연구 등이 있었다

모두 위안부와 같은 전후 보상 문제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화해 정책은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에 기여하긴 했지만

한일, 중일 국민 간의 화해를 진전시키지는 못했다

 

 

♧ 한일, 중일 간 화해가 어려운 이유

일본에는 전쟁이나 식민지 지배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력이 있으며 일본 정부의 포용 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한일, 중일 간 화해가 진짜 어려운 이유는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 인식의 차이이다

 

일본은 섬나라이기도 하고 거의 모든 전쟁이

일본 밖에서 일어났다

일본에서 일어난 전쟁은 오키나와뿐이다

그래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한 전쟁을

실감하지 못했다

전쟁이 싫고 비참하다고 느낀 건 본토 공습 때부터였다

 

1944년경부터 격렬한 공습이 일본 본토에서 벌어져

이때부터 전쟁을 실감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 이유로 일본인은 자신이 전쟁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 인식은 8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일본 군인이 다른 나라에서 행한

수많은 잔혹행위가 밝혀지면서 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생각이 조금씩 변해갔다

 

오히려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그렇다고 90년대 이후 전쟁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다

폭풍이 왔다가 사라지듯 전쟁이 끝났다고

느낀 사람이 아주 많았다

 

특히 시골에 가면 대다수가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공습을 받은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일본 국민의 반 이상이다

그래서 침략전쟁인지 아닌지에 대해 하나의

생각으로 정리하는 일이 일본에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건 한국이나 중국과 다른 점일 것 같다

국민 개개인의 전쟁에 대한 의견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다

 

반면 중국은 중일전쟁의 승리로 오늘날의 중국 발전을

이룩했다는 항일전쟁의 역사의식이 정착되어 있다

한국도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로 보고 국가 역사관의 근간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 위안부나 강제동원 문제를 법적 결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한국은 법적 해결을 넘어 정의 실현을 바란다는 차이가 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에 반인도적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는

구체제에서 법적으로 구제되진 않았지만 민주적 정권에서는

구제함으로써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역사를 도덕적, 도의적인 관점으로 본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의 진위를 따지고 선악을 판단하려 한다

하지만 일본이 생각하는 역사란 역사가의 일이지

선악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국제분쟁의 법적 해결, 법적 지배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에 반해 한국과 중국은 법의 지배를 넘어 정의나 도의

그리고 역사적 정의를 중요시한다

역사와 법에 있어서 이런 근본적인 인식 차이를

극복하는 건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타협이 필요하다

 

그 예로 '중일국교정상화'와 '한일국교정상화'라는

협상이 있다

중일국교정상화에서 중일 간 합의의 본질은

역사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보류하고 양국이

그 문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성립시킨 점에 있다

안보, 대만, 역사 문제에서 법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쟁점을 표면화시키지 않겠다는 걸 분쟁 해결

매커니즘으로 삼고 이를 양국이 함께 완성한 것에

의의가 있다

 

한편, 한일국교정상화의 경우도 역사 인식 문제와

영토 문제 등이 법적으로 해결하기 힘들다는 점을

인식하고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다

상호 간의 쟁점이 될 만한 사안을 삼가고 자제하는 것에

쌍방이 합의했다는 것이 한일국교정상화의 본질인 것이다

 

즉, 중일국교정상화와 한일국교정상화는

법적 해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합의였다

따라서 중일, 한일 모두 역사 문제에 대하여

근본적 해결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심각한 외교,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도록 역사나 영토 문제를

양국 정부가 협력하며 신중하게 관리해야 한다

 

21세기에 존재감을 키워온 한중일 3국이

전 세계적인 과제에 대응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역사나 영토 문제가 해소되지 않더라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입장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분쟁은 상당히 억제될 것이다

 

2015년 3월, 방일한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강연 후

질의응답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제사회가 독일을 받아들인 것은 독일이 확실하게

과거와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으로 대표되는 형태로 독일이

과거를 극복하는 것을 지켜본 점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1945)

: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나치 독일전범들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치러진 재판

 

그런데 일본은 깊이 있게 역사를 직시해 왔다고

할 수 없으며 주변국이 관용을 베풀 수 있게 노력해왔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역사 문제에 임하는 일본의 자세는

주변국 입장에선 진실성이 결여됐다고 보여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주변국에게 신뢰받기 어려운 나라고

특히 역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나라로 여겨졌다

 

그럼 일본은 무엇을 해야 하나?

1. 지금까지 말한 역사 문제를 일본의 다음 세대에게

진지하게 계승하는 것이다

2. 쌍방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미래를 그리면서

이 공통의 목표를 향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다

3. 일본이 전쟁 후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동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국제적인 공헌을 하는 데 지속적으로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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