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지은이 구병모
펴낸곳 자음과 모음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처음 느낀 솔직한 감정은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였다. 내용이 어렵지는 않은데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읽히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생각보다 익숙지 않은 단어들도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사전을 찾아봐야 하기도 했다. 우선 제목부터가 낯설다. 파과는 사전적 의미로는 여자의 나이 16세, 남자의 나이 64세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흠집이 난 과실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작가는 말미에 되려 독자들에게 파과의 의미를 묻고 있다. 파과(破果)인지, 파과(破瓜)인지...
청부살인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주인공 '조각'은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되어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이전과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같은 일을 하는 청년 '투우'는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자신에게 쓸데없이 친한 척을 하며 이유없이 방해를 하는 '투우'는 사실 과거 '조각'이 살해한 대상의 아들이며 살인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이었다._p.127
'투우'는 자신의 삶을 '어쩌다보니'의 삶으로 정의한다. '조각'의 과거를 알고 성가시게 굴기는 하지만 그것이 딱히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때문은 아니다. '방역'이라고 불리는 살인청부업을 하게 된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삶에 대한 절실함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어린 시절의 그 사건에 대한 기억만은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조각'에게 집착을 보인다. 그러나 '조각'에게 '투우'는 마치 냉장고에서 상해버려 먹을 수 없게 된 파과(破果)처럼 그저 잊혀진 존재에 불과했다.
당신이나 나나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서글픔을 포함하고 있었다.
'투우'의 존재가 성가시긴 하지만 '조각'에게 큰 의미는 없다. 자신의 노화와 더불어 찾아온 생소한 감정들과 변화들을 감당하기만도 벅차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자신의 '방역' 작업에서 있었던 유일한 실수를 공유하고 있는 강 박사가 있다. 강 박사를 만나고 '조각'은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조각'의 또 다른 이름은 손톱인데 일처리가 날카롭고 빈틈없으며 깔끔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조각'은 업무적인 장점도 없거니와 제대로 된 이해도 없어 네일아트에 대해서 회의적인 존재였다. 그런 그가 소설의 마지막에 네일아트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손톱 손질은 그녀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이며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다짐으로 보인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말 것이라 부담도 없다. 다만 빛나기 위한 찰나를 위해 존재하는 네일아트처럼 자신의 나이 듦과 고달팠던 삶을 더 이상 괴롭게만 추억하지는 않는다. 때가 되어 사라지는 것은 존재했던 순간을 더 빛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에 하나의 조각으로 남는 것, 혹은 자신의 삶에 하나의 조각으로 남는 사람, 그리고 잊힌 또 다른 조각 그것들이 삶을 이루며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을 관통하기도 한다. 다만, 그러한 사람도 기억도 또한 삶 자체도 언젠간 사라지고 만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건가 대충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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