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옮긴이 홍은주
펴낸곳 (주)문학동네
이 책을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이거 소설 맞아? 수필 아니야? 하는 것이었다. 말을 하는 원숭이가 나오는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자기 고백적인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그만큼 이야기는 굉장히 일상적이고 사소하며 개인적이다. 그래서 가볍고 쉽게 읽기 좋은 소설이면서 일본적인 감성을 이끌어낸다. 별거 아닌 듯해 보이는 일이지만 거기서 나름의 의미를 찾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느낌이랄까.
<돌베개에>
서로에게 관심이 없던 두 남녀는 우연한 기회에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그리고 단카를 짓는다고 말한 여자는 후에 남자에게 자신이 만든 단카집을 우편으로 보낸다. 그 단카집의 제목이 '돌베개에'이다. 다른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가끔은 남자한테 안기고 싶어 진다'라고 말하며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_p15
그날의 기억과 그녀의 모습은 희미해졌지만 그녀의 노래는 남았다.
<크림>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녔던 여자애에게서 피아노 연주회 초대장을 받는다. 친하지도 않았던 아이의 초대장이 의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호기심을 풀기 위해 연주회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초대장에 표시된 장소에 다다를수록 의구심만 더 커질 뿐이다. 그리고 그 낯선 장소에서 낯선 이와 만나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누게 된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 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_p.48
보통은 낯선 곳을 가도 낯선 이를 만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작가의 상상인지 실제인지 알 수는 없으나 무탈하게 지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이 행운인지 불운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경계에 있는 일도 가끔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찰리 파커가 살아있었다면'이라는 기발한 생각으로 상상의 음반과 그에 대한 상상의 음악평을 하게 된다.
"자네는 나에게 다시 한번 생명을 줬어. 그리고 내가 보사노바 음악을 연주하게 해 줬지. 내게는 무엇보다 기쁜 경험이었어. 물론 살아서 실제로 그럴 수 있었더라면 훨씬 신났겠지. 하지만 사후에도 충분히 근사한 경험이었어. 난 언제나 새로운 음악을 좋아했으니까."_p.69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그를 좋아하면 이런 꿈을 꿀 수가 있을까. 이 정도 정성이면 인정해줘야 한다.
<위드 더 비틀스>
비틀스가 한창 인기였던 그 시절. 소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여자친구가 생긴 일이었다. 하루는 여자친구를 데리러 그녀의 집에 갔다가 그녀의 오빠를 만난다. 무언가의 착각이었는지 기다리던 여자친구는 오지 않고 소년은 그녀의 오빠의 부탁으로 아쿠타가와의 <톱니바퀴>를 낭독하게 된다.
그곳에는 음악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곳에 있었던 것도 음악을 포함하면서도 음악을 넘어선, 더욱 커다란 무언가였다._p83
우리는 우연의 이끌림에 따라 두 번 마주했다(중략)
평범한 담소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우리가 살아간다는 행위에 포함된 의미 비슷한 것을--시사하고 있었다. p.120
만나야 할 인연이라는 것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 누구를 어떤 형태로 재회하게 될지 그것이 두렵다면 아마도 지금의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시간을 만나도 희미한 존재가 있는가 하면 짧은 시간을 만나도 각인이 되는 존재가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 보이고 누구에게 감춰질까.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야구를 좋아하며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인 그는 야구 경기를 보다 틈이 생기면 시를 적고는 한다. 시라기에는 그저 단순한 개인의 감상을 적은 일기 같기도 한 그 시를 모아 기념으로 시집까지 만든다. 경기가 지든 이기든 그보단 그 시간을 즐기며 기록하는 것이 그에겐 더 중요하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_p.147
좋아하는 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 그리고 그 시간 중요한 것은 그뿐이다
<사육제(Carnaval)>
그가 지금껏 만난 여자 중에 가장 못생겼지만 음악 취향이 같은 그녀와의 만남은 즐겁다. 피아노곡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두 사람이 뽑은 것이 바로 슈만의 <사육제>였다. 그렇게 틈나는 대로 만나던 그녀와 어느 날부턴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내 인생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_p181
'누구를'이 중요한 순간이 있고 '어디에서'가 중요한 순간이 있고 '언제'가 중요한 순간이 있다. 같은 사람 같은 장소 같은 시간도 경우에 따라 다르게 지나고 흐른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여행을 하던 중 허름한 온천의 작은 료칸에 묵게 된 그는 온천을 하러 갔다가 원숭이를 만나게 된다.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원숭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레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며 손님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숭이에게는 이름을 훔치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말이에요. 모순이라고 할까요. '원숭이의 인생'이라니. 후후후"_p203
일단 구조적으로 가능한 일이지만 원숭이에게는 말을 하게 만드는 신경회로가 없어서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뭐 그런 과학적인 이야기를 떠나서 현실적으로도 인간의 눈을 피해 말하는 원숭이가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그런 원숭이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누구라도 기꺼이 응하지 않을까? 인간으로서의 편견을 조금만 버린다면 말이다.
<일인칭 단수>
평소에는 슈트를 좀처럼 입지 않는 그가 왜 그날은 슈트를 입고 싶었을까. 그리고 왜 슈트를 입고 낯선 가게에 들어갔을까. 독서에 집중하지 못할 만큼 유난히도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왜 서둘러 집에 돌아가려 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지독한 불쾌한 어떤 감촉이 입안에 남았다. 삼키려 해도 삼킬 수 없고, 뱉으려 해도 뱉을 수 없는 무언가다. 할 수 있다면 그냥 화를 내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불쾌한 일을 당할 이유가 없으니까._p232
어떠한 이성적 판단이나 객관적 사실에 앞서 육감이 보내는 신호가 있다면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 께름칙함 그것이 유일한 돌파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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