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지은이 정보라
발행처 아작
값 14,800원
아, 진짜 무서워 근데 진짜 재밌어 반성해라 나 그동안 국내 소설에 많은 관심을 갖지 못한 거.
진작에 알았으면 좋았을 책이었다.
<저주토끼>를 포함하여 열 편의 단편이 담긴 이 책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욕망이나 악의를 보여주면서도 슬픔과 고독, 쓸쓸함 또한 드러난다. 이야기는 일상에 깊숙이 스며 있으나 눈치채지 못하는 인간의 감정을 일깨우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상상을 통해서 발현되기도 한다. 또한 미지의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며 우화처럼 다루기도 공포소설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저주토끼>는 복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토끼는 너무 귀여운데 저주는 너무 무섭다. 그 의외성이 주는 공포는 한층 더 무섭다. 예전부터 무서운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자장가가 나왔던 거랑 비슷한 맥락이랄까. 저주용품을 만드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소설은 한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 처절한 복수극을 그리고 있다.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하자면 통쾌하고 짜릿하다 할 수 있지만 소설에서는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라는 일본 속담을 이야기하며 복수를 하는 사람 또한 그 끝이 밝지만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_p.9
<머리>는 굉장히 독특한 소재의 소설이었다. 변기가 등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곳에서 내가 버린 것들로 만들어진 존재의 탄생이라니 상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공이 가장 무의미한 삶을 살며 고독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에 찾아와 그녀의 삶을 빼앗는다. 어쩌면 이미 그녀는 오래전에 자신의 삶을 빼앗긴 채 살았는지도 모른다. 가족의 권유대로 직장을 그만두고 결혼하고 집안일을 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삶은 아무 특징도 없이 평화로운 듯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늘 허전하다. 그녀의 삶에 명확하고 강한 존재감을 가진 존재가 어쩌면 '머리'가 유일한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이루지 못한 이상에 대한 발현이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물 외에는 아무것도 상상할 능력이 없어 보이는, 소박하고 건실한 남자였다. 낯선 이성 앞에서 그녀는 내내 화장실이 불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_p.42
<차가운 손가락은> 교통사고와 낯선 사람, 그리고 어둠이라는 배경을 통해 공간적인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소설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면 칠수록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것만 공포, 그럼에도 불구하고 벗어나기 위해 믿을 수 없는 존재에 의지해야만 하는 복합적인 두려움이 표현되는 이야기이다.
<몸하다>는 월경이 나오다, 월경을 치르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처녀인 채로 임신한 주인공이 나온다. 이 설정 자체만으로도 이미 공포다. 아이의 발육을 위해서는 아이 아빠를 꼭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 일이 쉬울 리가 없다.
<안녕, 내 사랑>은 인조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처음 만든 인조인간인 '1호'를 반려자로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제 그것의 수명이 다해간다. 새로운 인조인간을 통해 '1호'를 동기화 했지만 소중했던 존재였기에 쉽게 버릴 수는 없지만 점점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존재했습니다. 당신에게만은 대체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고 싶었습니다.」_p.141
<덫>은 마치 이솝우화에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황금이 흐르는 여우라니. 그리고 그것에 욕심을 내는 인간의 욕망이라니 너무나 권선징악과 같은 이야기일 것 같지만 물론 거기서 끝이 나지는 않는다. 더 지독하고 절망적으로 흘러간다. 물론 모든 것은 주인공의 그릇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복수는 진하게 그리고 피는 더 진하게 이어진다.
<흉터>는 미지의 짐승에게 제물로 받쳐져 동굴 속에서 살아가는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년의 삶은 너무나도 가혹하고 가엽다. 그에게 남은 건 짐승이 남긴 몸의 상처와 인간이 남긴 마음의 상처 뿐이다.
<즐거운 나의 집> 이제 이쯤 되면 독자도 눈치를 챌 것이다. 그런 집이 있을리가 없다는 것을. 집은 공포물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니까. 땅값이 싸고 조용한 동네를 찾아 이사한 부부는 4층 짜리 건물을 매입하게 된다. 그 이후로 부부의 주변에는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조금은 찝찝한 방식으로 일이 해결되기 시작한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결혼해서 가정이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집 밖의 문제를 피해 가정으로 돌아와도 가족이 집 안에서 또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_p.259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사막을 배경으로 황금톱니바퀴로 이루어진 배를 타는 신비한 존재가 등장한다. 모래사막의 왕은 이 황금 배의 주인과 전쟁을 벌이고 그로 인해 황금 배의 주인은 한쪽 팔을 잃게 된다. 황금 배의 주인은 모래사막의 왕을 향해 그의 자손들을 불구로 만들 거라는 저주를 퍼붓는다.
<재회>는 폴란드 광장에서 한쪽으로만 걷는 노인을 발견하고 그를 관찰하면서 시작된다. 노인은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그것을 같이 목격한 한 남자와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생존을 확인하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좋은 시간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으나 나쁜 시간을 소원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래는 없었다. 그와 내가 알았던 모든 삶의 유형들은 전부 과거에 갇혀 있었다._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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