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지은이 최은영
펴낸곳 (주)문학동네
값 14,500
최은영 작가의 소설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읽을 때마다 감정 소모가 너무 커서 힘이 빠진다. (세 번에 두 번은 울게 한다.) 웬만한 것은 다 읽은 것 같긴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당분간 좀 피해야겠다. 원래 사람 만나는 것도 처리해야 되는 하나의 일로 인식하고 사는 사람이라 모임이나 만남을 즐기지 않는 편인데 하루에 꽤 여러 사람을 만난 듯한 피곤함이 몰려온다. 긍정/부정을 떠나서 그만큼 공감하게 되고 순간 주인공에 동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소설 「밝은 밤」은 주인공 '지연'이 어렸을 적 할머니와 살았던 기억이 있는 여름 냄새가 나는 도시 희령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고 선택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할머니를 만나고 자신을 닮은 할머니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 나의 4대에 걸친 보석 같은 이야기들 속에서 여성의 삶과 그들의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삼천과 새비, 영옥과 희자, 그리고 명숙 할머니, 새비 아저씨 그 모질고 긴 세월을 함께 한 동지이자 서로에게 버팀목이었던 존재들. 그 긴 시간을 담고 있음에도 지루함 없이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 과거의 인물들에게 몰입하게 된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어 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사람은 상처를 받을수록 마음의 문을 닫고 치유보다는 외면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치유에 과정에서 다시 상처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살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외상이라면 그냥 약 바르고 붕대 감으면 좋을 텐데 보이지 않아서 치료도 어렵고, 또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지연'의 증조할머니 '이정선'. 삼천에서 와서 삼천이라고도 불리던 그녀는 백정 출신이라는 이유로 고향에서는 구박을 받고 결혼 후 정착한 개성에서도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삶에 대한 기대는 사치이고 위험하니 체념하고 살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살 수는 없었으나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면서 체념하지 못하는 삶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천주교를 믿으면서도 남존여비는 있었던 시절
전남편이 저버린 것은 그런 내 사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원폭이 떨어진 히로시마에서 살아 돌아온 '새비 아저씨'를 보고 울었던 '새비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연'은 전남편을 생각한다. 누구의 손해가 더 큰 것인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더라도 살면서 누군가에게 그만큼 진심인 마음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사랑 이야기가 하도 흔하고 넘쳐나서 언제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온 마음을 다해 상대를 위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지연'은 자신의 엄마와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 싸워봤자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이니 적당한 선에서 알아서 피하는 법을 택한 것이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사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묶여 있는 관계만큼 복잡한 것이 또 있을까. 너무 가까운 사이라 함부로 대하기 쉽고 또 그래서 가장 대하기 어려운 사이이다. 감성과 이성의 사이만큼 먼 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넌 나랑 달라. 그 애의 딸이잖아. 엄마가 딸을 용서하는 건 쉬운 일이야."
엄마와 싸우고 화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지연'에게 할머니는 말한다. 엄마가 딸을 용서하는 일은 쉽다고. 나의 생각에 몰입되면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할 여지조차 생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할머니는 제삼자이지만 할머니 또한 엄마의 엄마이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 마음은 부모가 가장 잘 아니까.
소설을 다 읽고 표지의 밝은 밤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어두운 밤 동이 트기 전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는 주인공 '지연'이 이혼 후 바다가 있는 도시 희령으로 와서 보게 되는 창밖의 풍경이다. 자연은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때가 있다. 사람에게도 가족이든 친구든 그런 존재가 있다. 그저 그 자리에 밝게 빛나 주는 것만으로도 한 발자국 내딛게 만드는 존재. 어두운 밤과 같은 시기를 지날 때 떠오르는 해처럼 그 길을 밝혀주는 빛과 같은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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