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위대한 수업2(인사이드 차이나 문화) 1강~8강 요약정리
위대한 일흔 번째 강연 '인사이드 차이나 문화 '(시즌2 스물여덟 번째)
위화 소설가
1강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 삶의 양분의 되는 경험들
· 중국 현대 문학의 대표작가, 세계가 중국을 들여다보는 창
위대한 사람의 속마음은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은 잘 이해한다
평범한 사람에 대해 글을 쓸 땐 나 자신에 대해 쓰는 느낌이다
그 사람들의 운명을 알고 그들이 느끼는 행복이나 불안 그리고
고통과 일상도 잘 안다
· 의사였을 때는 온종일 치아를 뽑았다
충치에 충전재를 채우고 의치도 만들어야 했다, 발치나 충치 치료, 의치 제작도 잘했다
당시 중국에선 모든 직업이 박봉이었다
치과의사 수입은 월 32위안에 보너스도 없었다
5년간 문제없이 일했지만 치과 일이 정말 싫었고 결국 그만두었다
· 문화관 사람들은 맨날 길거리를 쏘다니며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문화관에서 일하고 싶었다
너무 부러워서 왜 일을 안 하냐고 물었더니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자기들 일이라고 했다
1980년대 초반 중국에서는 치과의사도 작가도 가난했다
그런데 치과의사는 가난하고 일도 고됐다
'어차피 가난할거라면 자유라도 있는 게 낫지 않겠어?
문화관으로 이직하기 위해 소설을 써서 발표(첫 번째 기숙사_1983)한 뒤 순조롭게 이직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진짜 이유들 중 하나는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매일 지각하다 한 달쯤 뒤부턴 오후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다시 두세 달쯤 지난 뒤부턴 일주일에 한 번 출근했다
또 몇 달 뒤에는 월급날에만 출근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월급을 직접 수령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금 지급이라 서명을 해야 했다
문화관에서 직원들에게 자전거를 줬는데 출근을 거의 안 하니까
그를 잊어버려 혼자만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문화관에 들어간 후 간부 신분이 되었다
1980년대 중국에선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간부를 해고할 수는 없었다
태평하게 일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다
혼내고 욕하던 상사도 무책임한 모습에 익숙해져 나중엔 결국 받아들였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사회주의가 남겨 준 최고의 추억이다
사회주의 끝자락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누렸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라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수많은 문학 작품이 파괴되었다, 극히 일부 작품들은 비밀스럽게 보존됐다
낡은 신문지로 싸서 옷 속에 숨긴 책은 품고 다니며 몰래 빌려주곤 했는데
그 책들은 읽다가 떨어진 낱장을 붙이지 않아 보통 앞뒤로 10쪽이 넘게 비어 있었다
그땐 소설을 읽으면 시작과 결말을 알 수 없었다
제목도 작가도 몰랐다
<인터내셔널가>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디에도 구세주는 없노라, 우리들 스스로를 구하자"
그래서 결말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릴 적부터 상상력을 키우는 훈련을 한 것 같다
어떤 경험을 하든 모두 삶의 양분이 된다
이 경험이 일종의 문학 창작 연습이 됐다
덕분에 작가가 된 뒤 쉽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땐 열심히 공부했지만 중학교 때는 학교에 잘 다니지 못해 아는 한자가 많지 않았다
유명한 작가가 되자 중국 비평가들이 간결한 글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소설이 영어로 출판된 뒤 미국 학자들은 헤밍웨이의 글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마오쩌둥 주석은 이런 말을 했다
"좋은 일이 나쁜 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계속 바뀐다
어렸을 땐 읽을 책이 없었고 그나마 읽은 책에는 결말이 나와 있지 않아서
직접 결말을 상상하다가 글을 쓰는 능력을 키웠다
어린 시절부터 창작을 연습한 것이다
아는 한자가 별로 없어서 글을 간결하게 쓸 수밖에 없었고 그게 문체가 됐다
2강 중국은 왜 축구를 못할까
- 부패가 만연한 중국 사회
· 중국 축구를 보면 옛날 일들이 떠오른다
1980년대부터 축구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 시절 아시아에선 한국이 축구 강국이었다
한국과 중국이 아시안 예선 경기를 치렀는데 중국이 3대 0으로 뒤처지다 3대 3까지 쫓아갔다
베이징의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 강했던 한국을 동점으로 따라잡아 애국심이 한껏 부풀었다
일본은 태국이나 베트남과 비슷한 실력이었으나 축구 백년대계를 세워
차근차근 경기력을 키웠다
그 당시에는 일본에 지면 비웃음거리가 됐지만 이제는
중국이 태국이나 베트남에 지더라도 놀랍지 않다
· 중국 누리꾼들은 보통 일본을 싫어한다
그런데 이번 카타르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일본이 월드컵 챔피언 두 팀을 격파하고 예선 1위로
16강에 진출하자 중국 축구 팬의 70~80%가 일본 팀을 응원했다
과거의 민족주의는 없었다, 민족주의가 아시아주의로 바뀌었다
월드컵에서 일본이 아시아를 대표하다 보니 일본이 잘하길 바랐다
프랑스와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결승전에 한 중국인 팬이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입고
재밌긴 했지만 민족주의에서 나온 행동이다
중국이 본선에 진출하길 바랐지만 그러지 못해
그런 방식으로라도 아르헨티나를 응원한 것이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복잡하고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과거와는 다른 형식과 다른 표현 방식으로 말이다
중국에서 축구가 상업화된 뒤로 대형 축구팀들은 매년 수억 위안을 투자하고 있다
몸값이 비싼 선수는 매년 수천만 위안을 번다
그렇게 큰돈을 벌어도 승부 조작에 가담한다
코치나 팀 단장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아무리 잘해도 경기에 내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 국가대표팀의 리 티에 감독도 그랬다
그 역시 비리로 체포됐다, 이런 게 문제이다
프로 리그팀에서도 뇌물을 주지 않으면 경기에 뛸 수 없고
국가대표팀에도 뇌물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더라도 경기에 뛸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런 부패가 축구계에 만연해 있다
이런 부패는 중국 축구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큰 해악이다
나라 전체에 부패가 만연한데 깨끗한 분야가 있을 리가 없다
축구계는 거대한 부패의 일부일 뿐이다
부패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에서 도태될 수도 있다
· 중국의 부패도 개혁 개방 시기부터 단계적으로 진행됐다
초창기의 부패는 그렇게 노골적이지 않은 완곡한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새 건설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앞서 착공식에
담당 관료를 불러 빨간 리본을 자르게 한다
초창기의 부패는 리본 자르는 가위를 99% 순금으로 만드는 정도였다
일부 관료들은 횡령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진짜로 아프든 말든 일 년에 두 번씩 병원에 입원할 수는 있다
동료나 부하 직원들이 매일같이 병문안을 온다
큰돈은 아니더라도 3천 위안(약 56만 원) 정도를 건넨다
왜냐면 이것이 중국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 입원하고 나면 30만 위안(약 5,673만 원) 정도를 챙길 수 있다
마오타이주는 병 안에서도 계속 발효되기 때문에 오래 놔둘수록 숙성돼
점점 더 맛있어진다
액체로 된 금이라 불리는 선물이다
술은 마시면 그만이니까 사람들이 뇌물이라 여기지 않았다
지금은 뇌물이지만 그땐 아니었다
부패한 관료의 집엔 선물 받은 마오타이주가 많다
현금을 주기도 했는데 종이 상자에 현금을 담아서 그대로 줬다
· 18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회의 이후 시진핑 주석은
집권 직후 대규모 반부패 운동을 벌였다
많은 관료들이 적발됐고 집에 1억~3억 위안의 현금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건 중국 사회에서 매우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다
부패한 관료들이 중국 경제에 도움이 됐다는 점이다
중국 경제학자들은 광의통화의 과잉 공급을 우려했다
중국 정부가 매년 돈을 너무 많이 찍어냈기 때문이다
중국 물가상승률은 낮은 편이다
최소 수백억 위안이 부패 관료들의 집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감히 쓰진 못했을 것이다
요즘 중국 정부는 무섭게 관리 감독한다
5만 위안을 입금하더라도 공민신분번호를 기록해야 된다
은행에 드나드는 돈은 모조리 추적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패 관료들은 감히 은행에 입금할 엄두를 못 낸다
그런 돈이 최소 수백억 위안은 된다
시장에 풀리지 못한 채 부패 관료들의 집에 묶여 있어서
그렇게 많은 돈을 찍어냈어도 물가상승률이 낮았던 것이다
부패한 관료들이 중국 인플레이션 억제에 도움을 준 것이다
· 중국 축구에 아직 희망은 있다
상대는 장촨현의 아마추어 축구팀이었다
베이징 궈안의 패배는 전국적인 화제였다
징촨현은 핑량시에 속한 곳이었다
핑량시에는 실제로 12개의 아마추어 축구팀이 있다
축구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을 내면서 공을 차는 축구에 진심인 곳
축구가 좋아서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프로 축구팀을 이긴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어딘가에 희망이 있다
우리는 그 빛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
그 빛 덕분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믿음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절망할 것이다
유서 깊고 강한 프로 축구팀 베이징 궈안이 간쑤성의 가난한 아마추어 축구팀에 진 것은
오히려 좋은 소식인 것 같다
중국에 아직도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중국 축구의 미래이고 희망이다
3강 중국에는 왜 짝퉁이 많나
- 되살아난 봉건주의
· 중국은 도시를 건설하면서 많은 집과 공동묘지를 철거했다
공동묘지를 철거하는 것은 수많은 묘를 이장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국에서 남의 집 묘를 옮기는 건 전쟁 선포나 다름없다
1,000개가 넘는 묘를 이장해 하나의 큰 무덤에 합장하기도 했다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정부에서 보상으로 돈을 지급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동의해 주었다
그 후 주민들이 이주하도록 하고 그 자리에 공장 건물들을 지었다
농민들은 아파트로 이사가게 됐다
1,000개 이상의 묘를 이장한 뒤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그 많은 묘가 다 떠내려갔다
그러자 농민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1,000개가 넘는 묘의 유족은 1만 명이 넘었다
1만 명이 넘는 농민이 들고일어나 시위를 벌였다
당시 구청장은 농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속인들을 불렀다
농민들은 공산당을 믿지 않지만 무속인들의 말은 믿었다
중국에는 물이 부를 가져다준다고 믿는 문화가 있다
물에 씻겨서 돈을 벌게 된다는 것이다
열 명이 넘는 무속인들이 우산을 쓰고 폭우를 뚫고 집집마다 찾아가 말했다
"축하합니다, 부자가 되겠군요"
그렇게 소동은 겨우 막을 내렸다
문제를 해결한 건 사회주의가 아니라 봉건주의였다
유족들은 뒤섞인 유골을 구분해 달라는 요구도 했다
유족들은 DNA 감정을 요구했다
재가 된 유골이 서로 섞여버려 DNA 감정은 불가능했다
공무원들은 정부가 DNA 감정에 동의했다고 말하고
정말 의향이 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족보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냐고 말이다
당신의 할아버지가 이웃 여자랑 자서 당신의 아내를 낳은 거라면
조상들의 치부가 모두 드러날 테니 DNA 감정은 그만두라고 했다
DNA 검사를 하면 명망 높고 위엄 있던 가문이 알고 보니
아무 하고나 자고 다닌 사람들이라는 게 들통날 테니 덮어 두라고 말이다
마을 사람들도 그 말에 납득했다
마지막에는 결국 봉권주의가 필요하다
· 중국 개혁 개방(1978~) 정책으로 되살아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닌 봉건주의이다
중국의 민간경제는 개혁 개방 정책 덕분에 성장했다
시장의 수요에 따라 경제가 움직이는 시장경제로 전환한 것이다
예전에 중국인들은 시장경제가 곧 자본주의라고 생각했고
계획경제는 사회주의라 여겼다, 그래서 두 진영이 격렬하게 싸웠다
그런데 덩샤오핑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러니 논쟁하지 말라, 자본주의를 택할지 사회주의를 택할지 싸우지 말라
싸우는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다
중국은 오랜 세월 동안 가난했으니 이제 그만 싸우고 경제를 발전시키자
그러나 여전히 자본주의를 복원하려 한다며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다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 자본주의로 돌아갈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집권했을 때 중국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다
(상하이에 일부 자본가가 있긴 했지만)
중국은 농경사회에서 바로 사회주의로 넘어갔다
자본주의를 경험한 적이 없다
중국은 봉건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직행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과 기성세대의 혁명가들이 자본주의가 되살아난다며 걱정했지만
되살아난 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봉건주의였다
· 오늘날 중국의 제조업은 세계 최고이다
처음에는 지방정부가 공장을 지어주고 전기와 수도도 연결해 줬다
업체에서는 기계를 설치하고 공장을 돌리기만 하면 됐다
공장 바로 옆에 철도와 도로도 놔주었다
개혁 개방 시기에 해외 자본을 유치하고 국내에 투자할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인도와 베트남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노동자도 다르다
중국의 노동자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며 기술을 익힌 숙련공들이다
기술을 쌓는 데엔 훈련이 필요하고 훈련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퇴근 시간이 되면 하던 일을 모두 멈춘다
중국에서는 일하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 제조 산업이 매우 탄탄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중국 제조업이 외국 기업들과 30~40년 동안 쌓아온 돈독한 관계는
금방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가난한 국민들은 여전히 매우 많다
유연취업자 수가 2억 명에 달한다
이 2억 명은 최근 3년간 팬데믹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 중국에는 왜 싸구려 제품이 많은 걸까?
가짜 분유와 가짜 제품들, 해적판 서적이 나도는 건
중국에 가난한 인구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수입이 적어서 건강한 음식을 먹을 여유가 없다
이들이 먹을 수 있는 거라곤 가짜 식품과 불량식품 같은 위조 식품뿐이다
몸에 해롭지만 먹을 수밖에 없다
반면 불법 복제는 몸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해적판 <인생>을 읽는다고 해서 코로나에 감염되거나
열이 39도로 오르진 않는다 → 책은 전혀 상관이 없다
위조, 가짜, 불량 상품 중에서도 서적은 그나마 가장 건강한 물건이다
<인생>의 정품 도서는 2천만 권 이상 팔렸지만 해적판이 5천만 권이다
"해적판도 좋다고 생각한다"
책 홍보에 엄청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지식재산권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크게 감동한 적이 있다
집이 가난했을 때 해적판을 사서 읽었지만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고
일하면서 수입이 생기자 정식 출판본을 사서 책장에 꽂아 뒀다는 것이다
중국의 방대한 빈곤층이 유지되고 중국의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해적판이 계속 나와야 한다고 본다
솔직히 해적판 영화도 본다, 보고 싶은 좋은 영화들(특히 한국영화)은 해적판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 영화관에서 개봉하지 않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정품 DVD를 구할 수도 없다, 불법 다운로드만 할 수 있다
4강 사랑이란 무엇인가
- 사랑의 힘
· 이탈리아 남자가 담배 사러 간다고 하면 도망치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별을 의미)
10년 넘게 못 만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면 친구가 남자든, 여자든
남편이나 아내의 안부를 물을 수가 없다, 이혼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 중국이 그렇다
심지어 부부가 둘이 같이 나타나도 물을 수 없다, 이미 헤어진 걸 수도 있다
· 지금과 달리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대외적인 사회 분위기가 매우 엄혹했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이혼율이 매우 낮았다
그때 외도를 하면 길거리에 끌려다니며 공개적으로 모욕당했다
외도한 여자는 머리 반쪽을 밀린 채 끌려다녔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이렇게 가혹했는데 어째서 가족 관계는 돈독했던 걸까?
그때보다 분위기가 완화된 지금은 가족 관계가 왜 더 위태로운 걸까?
돈과 사회적 지위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은 평균주의 사회였다
남녀 모두 일을 했지만 벌이가 적었다
요즘 시대의 사랑은 지극히 물질주의적인 사랑이다
지금 중국 분위기가 그렇다(상대는 어떤 집안인지, 가정형편은 어떤지)
이런 분위기 때문에 요즘 중국 청년들은 대부분 연애를 포기했다
연애를 하면 힘들고 괴로운 문제들이 바로 뒤따라 오기 때문이다
(집, 자동차, 지참금 등, 중국은 남자가 여자 집에 지참금을 줘야 한다)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돈이 없는 건 마찬가지이다
요즘 청년들에게 돈은 참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 세대(1980년대)에는 사랑만이 중요했다, 사랑 때문에 만났고 물질적인 이유는 없었다
요즘 세대가 잘못됐다고 비판할 순 없다
베이징 같은 대도시에서 살 곳이 없거나 직업이 없으면 살아가기가 정말 힘들다
20년쯤 뒤에는 청년들의 사랑관이 또 달라질지도 모른다
환경도 시대도 우리의 관점도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분명 우리에게 영원하다"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
사랑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 남녀 간의 사랑은 물론 우정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절박한 상황에 처했거나 인생의 밑바닥에 있을 때
주위 사람들의 우정과 응원을 받는 것도 일종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삶을 이어가게 하고 멀리 나아갈 수 있게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준다
· 문화대혁명 시기에 학교 친구의 아버지가 거리로 끌려 나와 비판투쟁을 당했다
정신적, 신체적 구타와 치욕을 당했다
그분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우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다들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당시에 외식을 하는 건 사치였다
국수를 다 먹고는 친구가 아버지께 물었다
"아빠, 내일도 국수 먹으러 와도 돼요?"
"그럼~ 많이 먹으렴~"
그리곤 그날 밤 아버지는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셨다
중국 남부 지역의 우물은 입구가 좁아서 머리부터 떨어지면
몸을 돌릴 공간이 없어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다
다음 날 아침, 친구는 가방을 메고 울면서 학교에 왔다
그 친구를 가엽게 여겨 탁구를 하던 친구들이 그 친구를 불렀고
그 친구가 첫판을 이겼다
첫 번째 시합 때 친구는 울고 있었는데 첫판을 이기고 둘째 판을 칠 때가 되자
눈물을 그쳤다
셋째 판도 연거푸 이겼다, 그제야 친구가 웃었다
그때 그 장면을 돌이켜보면 삶이란 이토록 강대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삶의 위대함은 사랑에서 나온다"
삶은 슬픔 가운데 기쁨을 편집해 넣는다
그 친구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 됐다
나중에 좋은 대학에 입학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해외 명문 대학의 교수가 됐다
친구들의 사랑 덕분에 이 친구는 슬픔과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행복과 삶의 희망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랑이야말로 인류를 존재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5강 나는 왜 죽음을 이야기하나
- 중국에 몰아친 자살 광풍
· 1970년대 당시에는 중국 일반 가정에는 화장실이 집 안에 없었다
전부 공중화장실이었다
집 앞에 공중화장실이 있었는데 남자 화장실 앞이 병원 영안실이었다
남자 화장실에 갈 때는 영안실을 지나가야만 했다
처음엔 영안실이며 남녀 화장실에 모두 문이 있었다
그런데 문을 달아놓으면 가구를 만들려고 사람들이 문짝을 다 떼어갔다
그때 영안실은 아주 작았다
그 시절 영안실에는 1인용 시멘트 침대 하나뿐이었다
영안실을 지나갈 때마다 내부가 참 깨끗하고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여름엔 아주 시원했다(그곳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살다 보면 추억을 다시 떠올릴 만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 계기가 바로 문학이다
· 20대 때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방랑의 노래>를 우연히 읽었다
이 시를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어릴 적 영안실에서 낮잠을 자던 날이었다
죽음의 첫인상도 그랬다, 서늘한 밤 같았다
이것이 문학의 매력이다, 문학은 과거의 경험을 되찾게 한다
잊고 있던 경험들이 다시 깨어나도록 해준다
삶의 경험을 통해 과거에 읽었던 문학 작품을 떠올리기도 한다
· 소설 <형제>가 프랑스어로 발간돼 홍보차 프랑스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파리의 거리에 서서 통역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중국의 문인 구양수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람과 사람이 스쳐 지나가며 몸이 닿고 손이 닿았다
사람들이 지나치는 순간 바람이 일면서 서로의 머리카락이 스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표정으로 서로에게 무관심했다
오히려 멀리 떨어진 해 질 녘 노을이나 석양과 더 가까워 보였다
그 후로 구양수의 시를 잊은 적이 없다
· 죽음은 문학에서 다양하고 중요한 주제이다
과거 위진남북조시대의 진나라에 살았지만 지금은 사라진 새에 대한 이야기
당시 진나라에는 <수신기>를 쓴 간보라는 관리가 있었다
<수신기>는 중국의 유명한 고전문학 작품이다
<수신기>의 저자 간보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저 새는 춤추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니 청동 거울을 가져다주시지요"
춤을 좋아하는데도 반년 간 춤추지 않았던 새는 거울 앞에서
사흘 밤낮을 춤추다 결국 쓰러져 죽어버렸다
지난 40년 동안 겪은 중국은 문화대혁명가 개혁 개방을 거쳐 현재로 이어졌다
보통 사람들의 죽음이나 자연사가 아닌 자살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화대혁명 때부터 지금까지 자살률이 최고치를 기록한 세 번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가 지난 반세기 중국 현대사를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1. 문화대혁명초기
(문화대혁명: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사회·문화·정치상의 대변혁)
당시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 심지어 중일 전쟁에도 참전했던 많은 노혁명가들이
그들의 자식들과 함께 숙청됐다
사회적인 명성과 지위를 잃고 괴롭힘의 대상이 된 것이다
중국의 대문호 라오서(중국의 소설가)도 이 시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자살했던 사람들은 주로 지식인이나 고위 간부였다
인격적인 모욕이나 신체적 학대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가 처음으로 자살 광풍이 불던 시기이다
2. 문화대혁명 직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덩샤오핑이 돌어왔다
덩샤오핑은 세 부류의 사람들을 처벌해야 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사람들을 때리고 기물을 부수고 금품을 약탈한 세력을 처벌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문화대혁명 때 반란을 주도한 사람들인데 정부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기 시작했다
10년 전에 자신들이 고문했던 지식인들과 간부들이 자살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희망이 없음을 느낀 것이다
역사가 자신들을 심판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지난 50년 사이 두 번째 자살 광풍이 분 시기이다
많은 홍위병이 자신의 운명을 비관해 목숨을 끊었다
덩샤오핑은 일부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는 건 맞지만 진짜 잘못된 건 사람이 아니라 시대라고 생각했다
결국 1~2년 뒤 홍위병들을 모두 풀어주었고 국가 재건에 집중했다
3. 시진핑 집권 초기
30년 동안 중국은 경제 호황을 누렸다, 매년 GDP 성장률이 10%가 넘었다
물론 부패도 다시 기승을 부렸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부패가 심각한 수준인 걸 깨닫고 부패를 척결하기로 했다
이때 거액을 횡령한 관료들이 대거 자살했다
중국의 역사는 언제나 잔혹했다, 50년 동안 세 차례나 자살 광풍의 시기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 30년 넘게 혼란을 겪어온 중국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난맥상을 글로 쓰고 싶었다
그러다가 죽음의 관점에서 소재를 찾아보기로 했다
소설 <제7일>에서 죽음과 관련된 사건을 다뤘다
죽음이란 건 남을 욕하거나 저주할 때 쓰는 말이지만
이를 아주 아름다운 낙원으로 묘사했다
도입부가 좋았던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떠올랐다
장례식장에서 죽은 양페이에게 연락을 한다
장례식장에서는 이미 아홉 시 반이라 화장에 늦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화장에 늦었다는 것이 아주 흥미로운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 문학 작품이 단순한 글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담고 있다"
중국의 젊은 독자들이 훗날 소설을 읽으면서 단순히 문학 작품을 읽는 게 아니라
당대의 중국 사회와 역사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사회와 역사의 산물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게 아니라 사회와 역사에 의해 탄생한 존재이다
6강 코로나19는 어떻게 지나갔나
- 중국의 특별한 힘
· 코로나19가 창궐한 지 3년이 됐다
우한시는 2020년 1월 22일 공식적으로 봉쇄됐다
5월까지 격리했고 5월이 되자 확산세가 주춤하는 분위기였다
팬데믹이 시작됐을 때 우한을 봉쇄한 건 필수적이었다
2022년 12월 제로 코로나 정책 완화
그런데 제로 코로나 정책을 완화하자마자 감염자가 폭증했다
당시 베이징에서는 매일 2천~3천 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베이징 전체가 조용했다
생필품 때문에 마트와 약국만 문을 열었고 다른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중국 정부는 2022년 12월에 제로 코로나를 철회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통제 불능이 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오미크론의 전염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갑자기 변이 했다
갑자기 철회할 거라곤 예상치도 못했다
약국에서는 감기약이 동났다, 해열제도 품귀 현상이 벌어져서 살 수가 없었다
2003년도가 생각났다
사스가 유행할 때였는데 이유를 모르겠지만 먹는 소금이 동났다
사스랑 소금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땐 소금이 품절이었다
코로나19로 우한이 봉쇄됐을 땐 마스크가 동이 났다
당시 중국인들은 전 세계의 마스크를 사재기했다
한 가족에 해열제 두 상자면 충분하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해열제를 몇십 상자씩 사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재기 때문에 공급 부족이 벌어진다
중국은 공황 상태에 처해있었던 것 같다
2003년 사스 때는 소금을 500kg 넘게 산 사람도 있다
중국의 전문가들은 이런 말을 했다
"오미크론의 치사율은 독감의 7~8배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제로 코로나를 철회하고 통제를 포기한 채
봉쇄를 풀어버리자 그 전문가가 말을 바꿨다(같은 사람)
"오미크론의 치사율이 독감보다 훨씬 낮다"
중국 누리꾼들은 바이러스는 그대론데 전문가가 변이 했다고 그를 비웃었다
중국생명보험에서는 코로나19 보험을 판다
많은 사람들이 약간의 돈을 내고 보험에 들어 두면
코로나에 걸릴 경우 수천 위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생명보험에서는 보험금 지급을 거부한 상태이다
현재 베이징 인구가 2,200만 명 정도인데 지금까지 확진자가 1천만 명은 될 것이다
보험금을 내주다가는 파산할 테니 지급을 거부하는 것이다
보험사도 변이 했다, 보험사는 오미크론이 코로나19가 아니라고 했다
지난 3년간 우리는 많은 일을 겪었고 훗날 분명히 문학의 소재가 되겠지만
작가에겐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적어도 5년은 지나야 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의 사회와 미래 그리고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고 싶다
아직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취업률과 실업률 두 가지 데이터를 본다
중국에서는 유연취업률에도 주목한다
유연취업률은 오늘은 일해도 내일이면 못 할 수도 있는 일자리를 말한다(택배, 배달)
배달원은 배달 건수에 따라 수입이 결정된다
중국의 유연취업자 수는 2억 명에 달한다
코로나19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요식업이나 서비스업 그리고 관광업 종사자들이다
이 분야의 유연취업자들이 유독 큰 피해를 입었다
정부 예산도 문제다
PCR 검사, 임시 격리시설 운영, 코로나 치료에 드는 비용을 모두 정부가 부담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는 특별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생명력이 강하다, 활력이 넘친다
중국 정부가 코로나 통제하기를 포기하고 정책을 포기하자
저장성의 상무부가 돌파구를 마련했다
저장성의 기업 1만 업체를 모아 유럽까지 날아가 계약을 따오려고 했다
저장성에는 가공산업이 발전했는데 가공업체들이 구호를 내걸었다
"잃어버린 3년을 되찾자!"
유럽의 고객들을 찾아가 계약을 시도했다
코로나로 또다시 통제가 되면 공장이 멈추게 되고
거래처의 주문을 제때에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은 물론 일본에도 10~30년씩 거래를 하며 돈독한 신뢰를 쌓아 온 회사가 많다
이들의 주문을 그동안 맞추지 못해 신뢰가 깨지기 시작했다
업체들은 서둘러 거래처를 찾아갔다, 중국 정부가 이런 방문을 주도했다
무려 1만 개가 넘는 기업들이 유럽으로 향한 것이다
거래처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장쑤성이 저장성보다 한발 빨랐다
쑤저우에서는 이보다 훨씬 앞서서 일본, 유럽으로 날아갔다
보여줄 기회가 없었을 뿐 중국인들은 활력이 넘친다
기회만 있다면 생명력이 뿜어져 나올 것이다
중국은 어떻게 30년 만에 경제 성장을 이뤄냈을까?
민간의 활력이 그 비결이다
7강 중국인은 대체 누구인가
- 삶의 의미와 문학을 통한 소통
· 칭하이성의 티베트 고원은 인적 없는 황무지이다
100km를 걸어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곳에 간혹 등짐을 진 중국인을 만날 때가 있다
주민들의 살림 도구들을 수리해 주고 다니는 것이다
하루 일이 끝나고 쓰레기를 주워 파는 가난한 중국인들도 많다
부업을 두세 개씩 하기도 한다
그렇게 견디면서 성실히 일하는 힘이 중국인 최고의 미덕이다
유럽 같은 나라들과는 문화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중국인이 탐욕스럽다고 한다 →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주말에 쉬지만 중국인들은 주말에도 일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욕심이 많아서 주말에도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두 문화의 인식이 달라서 생긴 차이이다
물론 큰 기업 직원들은 주말에 일하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자영업자나 가족 단위로 일하는 영세업자들에게 주말은 그저 일하는 날이다
중국의 공무원도 마찬가지이다, 주말도 휴가도 없이 일해야 한다
운명이 내게 주는 모든 시련을 견디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인내력이 중국 민족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참을성이 강하다
·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은 이상하게도 연애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여성들은 연애에 적극적이지 않고 남성들도 관심이 없다
집으로 돌아오면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한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친구들과 저녁을 먹기도 하지만 보통은 온종일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중국은 오랫동안 한 자녀 정책을 펼쳤고 그 세대는 모두 아이를 한 명만 두었다
지금 중국은 고령화 사회에 직면해 정부는 두 자녀를 권장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이를 세 명 낳으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중국 청년들은 아이를 아예 안 낳으려 한다
청년들이 너무나 피곤하기 때문이다, 업무 스트레스가 매우 크다
청년들이 인터넷에 네 자녀 정책을 해야 한다는 댓글을 남긴 걸 봤다
관을 안정적으로 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자녀가 세 명이면 관을 들기 힘드니까 네 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전쟁이 시작된 후 푸틴은 얼마 전에야 크림반도에 갔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양국의 전쟁
반면에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몇 번이고 전선에 나섰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하르키우 전투에서 승리하고 곧바로 이지움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포화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병들 앞에서 연설했다
사람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은 배우에 코미디언 출신이라고만 여겼고
푸틴은 비행기나 탱크도 조종하고 한겨울 얼어붙은 강에서 수영도 해서 강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된 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군이 돈바스를 탈환할 때도 함께했다
푸틴은 계속 크렘린궁에 숨어 있었다
그걸 보고 중국 누리꾼들이 한 마디씩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요즘 중국 청년들의 장점은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이다
물론 동영상을 많이 보기도 하고 온라인에서 많은 사람들과 채팅을 하기도 하지만
책도 많이 읽는다, 철학이나 역사책도 많이 읽는다고 한다
중국과 한국이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관심사를 이해하고 서로의 소망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국과 한국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사회제도든 이념이든 완전히 일치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고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그 첫걸음은 서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문학이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건 사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통해 자신의 느낌을 찾을 수 있다
만약 문학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독자들이
국적, 문화, 시대, 민족이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자신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타인의 작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문학으로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문학을 통해 중국인은 한국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대중이 한국의 대중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한국의 대중이
중국의 대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부정적인 요소들 속에서도 긍정적인 신호가 계속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신호를 꽉 붙잡기만 한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중국인과 한국인은 서로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중 정부의 관계가 어떻든 양국 국민들은 서로 좋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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