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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지식 사이

EBS 위대한 수업 4 팡 베이천 (삼국지 촉한의 영웅들) 6~10강

by 상팔자 2025.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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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위대한 수업 4 팡 베이천 (삼국지 촉한의 영웅들) 6~10강

위대한 백스물 일곱 번째 강연 '삼국지 촉한의 영웅들' (시즌 4 일곱 번째)

 

 

팡 베이천(Fang Beichen) 

중국 쓰촨대 역사문화학 교수

청두무후사박물관 학술위원

<삼국지 역주>

<삼국명장> 등 집필
 



 

 

 

(2024. 11. 18. 방송)

 

6강  관우 (하) 번성전투의 수엄칠군

 

 

 

(전편 이어서)

두 번째 큰 공은 바로 번성 및 양양 전투이다

이 전쟁은 219년에 일어났는데 유비가 상승기였을 때

번성전투가 일어난 그 해 상반기에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익주로 가서 성도를 함락시키고

북쪽으로 한중을 공격했는데 원래는 조조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곳을 유비가 함락시키면서 익주를 완전히 차지하게 된 것이다

유비는 가장 먼저 익주에 진입해 성도를 함락시킬 때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자 급하게 제갈량과 장비, 조운을 불렀다

관우는 남아서 형주를 지켰다

 

유비는 자신이 큰 업적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유비는 한중 근처에 흙으로 단을 쌓아 올리고

천지에 제를 올리며 스스로 한중왕이라고 칭했다

유비가 한중에서 왕이 된 건 촉한을 세우려고 힘쓴

사람들에게 큰 희소식이었다

이 희소식은 서쪽에서 동쪽의 형주까지 전해졌다

관우도 큰 공을 세워서 스스로 왕이 된 형님에게

선물을 바치고 싶었다

그렇게 번성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 번성전투: 서기 218년, 형주 강릉에 주둔하던 관우가

조위의 번성을 침공

 

관우는 군대를 대거 동원해서 큰 배를 탔다

선대를 편성해서 강릉에서 동쪽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장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까지 간다

그런 다음에 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번성과 양양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quot;alt&quot;:&quot;번성전투시 관우의 행로&quot;

 

걷거나 말을 타면 400리 이상을 가야 했다

육로로 가면 군사 물자나 군량 공급은 물론

부대가 걸어가는 것만도 힘들다

 

당시 번성과 양양을 지키던 사람은

조조의 대장군인 조인이었다

양양성은 한강의 남안에 있었기 때문에

형주에서 공격해 온다면 양양을 바로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양양은 수비가 쉽지 않을 테니

수비의 중심을 한강의 북쪽 번성에 뒀다

그런데 번성은 지형이 낮은 편이라 물에 쉽게 잠겼다

그래서 병력을 세 곳에 나눈다

조인은 본진을 지키고 두 명의 장수를 파견했는데

우금과 방덕이다

 

번성에 도착한 관우는 수군을 육군으로 전환한다

그때 하늘이 도와준다

관우가 번성에 도착하자마자 10여 일 동안 연달아

폭우가 쏟아졌다

평지에서 12~14m 높이까지 물이 찬 것이다

평지에 물이 차니까 우금 장군을 포함한 7개 군의

진영이 모두 물에 잠겨 버린다

그때 관우는 그 유리한 조건을 이용한다

원래 배를 타고 번성에 도착하면 육지에 올라와서

북안으로 가야 했는데

"모든 병사들은 다시 배에 올라타라"

수군에서 보병이 되었다가 다시 수군으로 돌아간 것이다

 

사람과 식량, 무기까지 모두 안전했다

관우는 선대를 분배하고 나눠서 공격을 시작한다

조인의 7개 군대가 주둔한 곳을 공격한 것이다

후세는 이 일화를 '수엄칠군'이라고 부른다

※ 수엄칠군

: 서기 219년, 관우가 폭우를 이용해 조인의 7군을 격파

 

위나라에는 다섯 장수가 있었다

 

&quot;alt&quot;:&quot;조위의 5대 장군&quot;

 

촉한에도 다섯 명의 장수가 있었다

 

&quot;alt&quot;:&quot;촉한의 5대 장군&quot;

 

촉한의 5대 장군과 조위 5대 장군의 싸움이었다

우금의 무예 실력도 기개도 관우에 비해 부족했다

관우는 높은 곳에 서 있는 우금을 발견한다

대부분 물에 휩쓸려 가서 부하도 몇 명 없었다

별로 공격도 안 했는데 우금이 투항한다

그렇게 우금을 포로로 잡았다

우금이 잡혔지만 7군 중에는 끝까지

저항하는 군대도 있었다

 

조조의 또 다른 장수인 방덕이다

방덕은 5대장군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펼친 활약을 보면 오대장군의 우금보다 훨씬 대단했다

방덕은 제방의 언덕에 올라 관우 군대의 공격에 

저항하다 결국 화살을 다 써 버렸고 먼 거리에서

적을 죽일 수 없었고 관우의 군대에게 생포된다

생포된 방덕은 관우 앞으로 끌려간다

하지만 한사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래서 관우는 방덕을 베어버리라고 했고

끌려 나간 방덕은 참수된다

 

북쪽 연안에는 조인도 있다

조인은 거센 물살과 관우 군대의 맹렬한

공격을 본 뒤 작은 배를 타고 북쪽으로 도망친다

이때 관우는 기세를 몰아 남쪽의 양양을 공격한다

남쪽에 있는 양양은 한강 때문에 북쪽이 막혀 있었다

그런데 관우 군대가 남쪽을 공격했으니 양양은

금방 함락된다

이번 전투에서 관우는 대승을 거두었다

 

☞ 우금을 생포했고 방덕을 참살했으며

조인은 도망쳤다

 

조인의 부하 3만 명을 생포해서 강릉으로 보낸다

큰 충격에 휩싸인 조위는 양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백성을 더 먼 곳으로 이주시키려고 한다

그렇게 한순간에 중원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관우는 엄청난 공을 세운 셈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수작을 꾸미는 사람이 있었다

 

관우의 막을 수 없는 기세를 본 조조는

아주 악랄한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고

강동으로 사람을 보내 손권을 만나게 했다

"형주를 되찾고 싶지 않소?

원래 형주는 당신의 몫이어야 했는데 

유비가 가로챈 것 아니오?"

'그런가?'

관우 군대가 모두 나를 공격하러 왔으니

어서 대군을 보내 유비의 거점을 빼앗으라고 한다

강릉성을 함락해 형주를 차지하면 형주뿐만 아니라

장강 이남 전체가 손권의 것이 되는 거라고 말이다

 

그건 손권이 바라던 일이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였으니 누굴 보냈을까?

젊은 장수 중에서 등용한 뛰어난 실력자인 여몽이었다

여몽은 만 명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강을 따라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형주 안의 촉한 군대인 관우가 맡은

방어 거점을 마비시키려 했다

관우가 강을 따라 검문소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몽은 상선으로 위장했다

배 위에는 무기도 군인도 없었다

그리고 노를 젓거나 돛을 움직이는 사람은

당시 상인이 흔히 입던 흰색 옷을 입었다

여몽도 배 위에서 흰색 옷을 입고 강을 따라

자리한 검문소를 속이고 강릉성 밑까지 도착한다

그제야 군대가 배에서 내려 공격을 시작했다

이 습격으로 강릉을 차지한다

형주 후방이 함락된 것이다

 

긴급 보고를 받고 이 사실을 안 관우는

서둘러 북쪽에 있는 번성과 양양에서 철수한다

그렇게 철수하는 도중에 이미 강릉 본진이

완전히 함락된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중간에 당양에서 서쪽으로 형산을

넘어 익주로 가려고 했다

그렇게 송도로 들어가려던 것이다

 

&quot;alt&quot;:&quot;여몽과 관우의 진로&quot;

 

하지만 손오의 기병이 추격해 온다

손오의 기병은 당양에서 관우를 붙잡았고

사로잡은 관우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다

관우의 수급을 낙양에 있는 조조에게 보냈다

관우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유비는 그 복수를 위해

오나라 정벌을 강행한다

관우의 수급은 오늘날 낙양 외곽에 묻혔다

지금은 그곳을 관림이라고 부른다

관림은 관우를 기념하는 곳이자 삼국의

명승고적이다

 

관우의 죽음에 대해 후대에 이런 평가가 있다

관우가 패한 원인은 거만한 관우가 이웃인

손오와의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해서

손오로부터 공격당한 거라고 말이다

그 이유는 형주의 소유권은 유비와 손권 사이의

핵심적인 이익 쟁탈 문제이다

관우가 온갖 방법을 써서 손오와 좋은 관계를 맺었어도

기회만 있으면 손오는 공격했을 것이다

 

책임은 유비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관우가 주력 부대를 끌고 공격했을 때

유비는 능력 있고 믿을 만한 장수를 

관우가 지키는 강릉 후방으로 보내지 않았다

도리어 인품이 부족하고 능력도 없는 장수를 보내

지키게 했다

여몽의 대군이 도착하자 그 장수는 바로 항복했다

관우가 촉한 건국 과정에서 기여한 공헌과 충성심을 보면

적장 안량 참살, 전투력

번성·양양 전투, 지휘력 

이 두 방면 모두 매우 뛰어났다

따라서 관우는 촉한의 창업 대장군 중 으뜸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2024. 11. 19. 방송)

 

7강  장비 (상) 장판파전투의 대갈일성

 

 

 

장비(미상~221년), 촉한의 장수

 

⊙ 장비의 이름과 자

장비는 <삼국지> 장비전에 확실하게 나와 있다

장비(張飛)의 이름은 비이고 자는 익덕(益德)이다

'이익의 익'이라는 것이다

'익'은 늘어난다는 뜻이다

익덕은 인품과 덕성을 쌓으라는 것이다

인품과 덕성이 쌓이면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

장비의 익덕이라는 자는 본명인 '날 비'와

뜻이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건 그 당시 유교 사상이 성행했다는 걸 나타낸다

유교는 인품과 덕성의 수양을 강하게 제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000여 년 뒤에 <삼국지연의>에서 

장비의 자가 바뀌었다

<삼국지연의> 속 1화에서 장비의 자가

익덕(翼德)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익'은 '날개 익'을 썼다

장비의 '비'가 난다는 뜻인데 날개 없이는

날 수 없으니 장비의 이름에 날개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장비의 둘째 형님이 관우(關羽)

만약 익덕(翼德) 으로 바꾸면 '깃털 우'와 '날개 익'이 된다

(유비의 양 날개가 되다)

그럼 '우익'이 되니 새의 날개인 것이다

그래서 익덕(翼德) 이라고 고친 것이다

<삼국지연의> 1화에서 장비가 처음 자기소개를 할 때

성은 장, 이름은 비, 자는 익덕이오

그때부터 잘못된 정보가 전해져 내려오게 된다

 

 

⊙ 장판파 전투

장비가 관우와 함께 유비를 따라 대업을 시작한 후

첫 번째로 중요한 공헌을 세운 곳은 바로 

당양 장판파이다

유비와 제갈량이 철수할 수 있게 엄호했다

※ 장판파전투: (서기 208년)

조조군이 형주 신야에서 도망친 유비를 뒤쫓아 벌어진 전투

 

208년에 조조는 대군을 동원해 남하하여 

형주와 (동쪽에 있는) 양주를 함께 소탕하려 했다

장강 이남 전체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어찌됐든 남쪽으로 내려오는 조조의 군대는

형주에 있는 유표나 유비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그중 정예 기병은 북부 초원에서 온 오환족 기병이었다

※ 오환족(烏丸族): 중국 고대 북방 민족 중 하나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용맹한 기병이다

달리는 속도도 빠르고 전부 실력이 아주 대단했다

 

당시 조조 대군이 남하할 때 유비는 형주의 도시인

신야에 주둔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형주에서 유표의 아들 유종은

조조에게 투항하려고 했고 이를 유비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조조 군대가 거의 다 이르렀을 즈음에야

유비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가족들과

제갈량을 데리고 관우, 장비, 조운의 보호를 받으며

남쪽으로 도망친다

도망치는 중에 또 임무를 나눠 준다

관우는 서둘러 배를 조달해 한강에서 강릉까지 가야 했다

그곳에서 조조를 피해 오는 유비 일행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장비는 뒤에서 적군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당시 장비는 단 20명의 기병을 이끌고 있다

 

조조의 기병은 밤낮으로 300리를 급행군해

당양시에 있는 장판파에서 유비 일행을 거의 따라잡았다

 

&quot;alt&quot;:&quot;장판파전투의 행로&quot;

 

앞쪽에서 도망치던 유비 일행 앞에 작은 하천이 나타난다

큰 하천은 아니지만 물살이 매우 거셌다

유비와 제갈량, 그 가족들이 다리를 건너자

장비는 기병 20여 명에게 다리를 끊으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20명의 기병과 남쪽 연안에서 지키고 있었다

 

조조의 기병 부대가 북쪽 연안에 도착했을 때

장비가 크게 고함을 질렀는데 역사서에 기록된

장비의 원문은 이렇다

"이 몸이 장익덕이다

와서 나와 사생결단을 내리자"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당시 사회의 예의는

자신은 이름으로 부르고 상대는 자로 부르는 거였다

이름을 부르는 건 겸손의 뜻이고

상대의 자를 부르는 건 존경의 뜻이었다

여기서 장비는 고함을 지를 때 자신의 자를 얘기했다

적한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본인의 자를 말하는 건 상대를 무시한다는 뜻이다

 

적군은 용감하고 위풍당당한 장비와

용맹한 부하 기병 20여 명을 보고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추격병은 돌아간다

그렇게 유비 일행은 무사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비가 이렇게 적군을 막지 못했다면

그날 유비와 제갈량 그리고 가족들은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람들은 장비 이야기가 나오면

장판파에서 고함친 걸 얘기한다

큰 고함 세 번에 물이 역류했다고 한다

장비의 위엄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 강주 전투

214년에 유비는 형주에서 성도를 공격했다

그런데 성도의 익주 군정 장관인 유장이 

부하를 이끌고 끝까지 저항했다

유비는 성도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익주 동쪽에 있던 제갈량과 장비, 조운에게

지원군을 이끌고 오게 해 함께 성도를

함락시키려고 했다

 

당시 장강 중류에 있던 형주에서 익주로 오려면

가장 가까운 길은 삼협을 지나서 배를 타고 

상류로 오는 거였다

상류에서 익주로 들어오면 첫 번째 군사 요충지로

정말 중요한 곳이 바로 강주였다

강주를 지키던 장수는 엄안이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장비는 엄안을 산 채로 잡는다

장비가 엄안에게 묻는다

"우리 대군을 어찌 영접하지 않고 감히 맞서 싸우는가"

화를 내며 엄안을 꾹짖는다

엄안이 답한다

"그대들이 도리를 어긴 것이오

그대들은 우리가 초대한 손님인데 도리어

익주를 점령하려 했으니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우리 익주는 유감스럽지만 끝까지 저항하다 목이 질릴 지언정

기개없이 항복하는 장군은 없소"

 

장비는 엄안을 끌고나가 머리를 베라고 했다

엄안은 일어서서 스스로 걸어 나간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또 몇 마디 받아쳤다

"머리를 벨 거면 베면 되지 왜 하를 내오?"

그렇게 말하고 엄안은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장비의 표정이 바뀌더니

"엄장군, 멈추시오!"

이렇게 말하고 엄안을 올라오게 한다

엄안을 묶은 밧줄을 풀고 귀한 손님처럼 대접했다

 

<삼국지> 장비전의 기록에는 장비와 엄안의

전투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장비와 엄안의 대화는 거의

한 글자도 안 빠지고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다

엄안을 아주 용맹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대장부의 기개를 가진 것으로 기록했다

엄안을 쓴 진짜 의도는 장비를 돋보이려고 한 것이다

엄안이 대장부의 기개를 가지고 있고

장비에게 저항할수록 오히려 장비가 엄안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했을 때 장비의 군자다운

품격이 도드라질테니까 말이다

익주 현지의 지방 명문 세력이 장비에게

거세게 저항치 않고 호의를 가질 것이다

엄안은 파 지역의 명문 호족 세력을

대표하는 장수였기 때문이다

 

장비가 엄안에게 잘 해준 건 사실 아주 

의미 있는 정치적 공작이다

장비는 강주에서 순조롭게 진군해

성도에 이르러 유비와 합류했다

<삼국지연의>는 장비를 우악스럽고 거칠며

경솔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사실은 아주 주도면밀하고 꼼꼼한 사람이다

 

 

 

 

 

(2024. 11. 20. 방송)

 

8강  장비 (하) 탕거전투의 지략

 

 

 

⊙ 탕거 전투

(서기 215~216년)

유비와 조조의 한중공방전이 시작된 후 장비가

탕거현에서 장합을 물리쳐 촉한의 세력을 확장한 전투

장비의 군사적 재능의 면모는 탕거에서 치른

멋진 전투에서 주로 다뤄진다

촉한의 5대장군에서 가장 뛰어난 관우가

번성과 양양에서 조위의 5대장군 중 우금과

맞붙었다가 우금을 생포했다

조위 오호는 촉한 오호와 비교가 안 됐다

장비가 탕거전투에서 다시 한 번

촉한의 오호가 조위의 오호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했다

 

익주에 들어간 유비가 제갈량과 장비, 조운의 지원군이 

도착한 뒤에 성도를 함락시키고 익주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유비가 다음으로 공격하려 한 곳은 익주의 가장 북쪽에 있는

한중군이었다

하지만 유비가 막 익주의 성도를 함락시켰을 때

한중군은 장로의 손에 있었다

당시 장로는 '오두미도'라는 종교 집단의 수장이었다

※ 오두미도(五斗米道)

: 중국 후한 말 장릉(張陵)이 창시한 도교의 교단

 

이 종교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 입교하려면

입교비를 내야 했다

입교비는 쌀 다섯 두이다 (5두 = 약 10Kg)

오두미도는 신도들에게 비교적 평등한 

경제적 분배를 시행했다

공산주의의 원시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오두미도는 매우 빠르게 성장한다

당시에 24개의 교구가 있었다

오두미도라는 종교의 힘은 한중을 근거지로 하여

세력이 비교적 큰 편이었다

 

당시 유비가 익주를 완전히 차지하려면

반드시 한중에 들어가서 장로를 없애야 했다

그런데 유비가 한중을 노리고 있을 때

진령 북쪽, 장안 쪽에 있는 조조도 한중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조가 먼저 진령을 넘어 한중 지대에 진입했다

조조가 막강했기 때문에 당연히 장로는 막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한중은 금새 조조의 점령지가 된다

 

조조는 장수 몇 명을 남겨 한중을 지키게 했다

그중에는 하후연과 장합이 있었다

모두 조조군의 뛰어난 장수였다

조조는 장안으로 돌아갔다

한중을 차지하고픈 유비의 당시 목표는 조조가 남긴

수비 군대로부터 그 구역을 빼앗는 거였다

그런데 유비가 움직이기 전에 한중에 남아 있던

조조군이 조조의 명령을 받고 먼저 움직였다

그중에서도 뛰어난 장수인 장합이 강한 병사들을 이끌고

미창산을 넘어 도착한 곳이 익주 남쪽에 있는 파서군이었다

조조는 장합에게  파서군에 가서 사람을 빼앗아 오라는

지령을 내렸다

 

동안 말년에는 장기간 이어진 전란과 대규모 흉작,

대규모 전염병 때문에 엄청나게 인구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인력 자원이 매우 부족했다

장합은 파서군에 들어가자마자 사람을

빼앗기 시작하지만 장비의 저항에 부딪힌다

유비가 익주를 얻었을 당시에 장비를 즉시

파서군 태수로 임명했었다

조위의 장 씨와 촉한의 장 씨, 두 장 씨가 싸운 것이다

그렇게 탕거전투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당시 거강이라는 강이 하나 있었다

그중에 강줄기 하나가 어느 한 곳을 흘러 지나갔는데

지나가면서 거의 폐쇄된 고리 모양을 만들었다

한쪽에 입구가 있고 아래쪽으로 동그랗게

땅이 있으며 다른 한쪽의 입구로 빠져나가는 모습이었다

강이 그 지역에 주머니를 만든 셈이었다

 

&quot;alt&quot;:&quot;거강의 폐쇄된 고리모양&quot;

 

장합은 데려간 사람들을 이 주머니 가운데에 뒀다

사방에 강물이 흘러서 쉽게 도망칠 수 없었다

물 위에는 감시하는 군대가 있고

북쪽에 있는 유일한 출입구는 장합의 진영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탕거전투는 앞서 언급한 이 주머니 모양 땅에 있는

팔몽산이라는 곳에서 벌어졌다

탕거현의 경계 안에 있었다

장비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현지의 지형과 지세를

파악한 뒤에 효과적인 반격 전략을 세운다

장합의 본영지는 주머니의 입구 쪽에 있었다

도착한 장비의 부대는 지형의 출구인

장합 본진의 출구 쪽에 본영지를 세운다

 

&quot;alt&quot;:&quot;장합과 장비의 장기전&quot;

 

양측은 장기전을 펼쳤다

장합은 산의 반대편에 있는 미창산 쪽의 

한중에서 왔으니 식량을 많이 가져오지 않았다

하지만 현지 사람인 장비는 현장에서

식량 조달이 되니 편리했다

식량이 떨어지면 적군은 싸우지 않아도 떠날 것이다

이게 바로 장비의 전술이었다

 

장합은 철수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빼앗은 인구를 북쪽으로 보내지도 못했다

그렇게 여러 날이 흐르고 장비는 적군의 식량이

거의 바닥났을 거라 예측했다

식량을 얼마나 가져왔는지는 군인과 군대를 보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합군은 하루 세 끼를 다 챙겨먹지 못했다

이때 장비가 갑자기 공격하기 시작한다

 

장비의 전술은 먼저 우세한 병력에 집중하는 거였다

장합 주둔지의 가운데를 공격해서 하나였던 막사를

두 개로 나누는 거였다

그런 다음 앞뒤와 좌우에서 협공한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자 장합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그 전투로 장비는 장합의 군대를 물리치고

장합이 데려간 사람들을 모두 풀어준다

이번 전투로 장비는 촉한의 오호가

조위의 오호보다 대단하다는 걸 증명한다

 

실제로 장합은 아주 유능한 사람이지만

탕거전투에서는 적을 얕봤다

유비의 군대가 익주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부하인 장비의 전투력을 가늠할 수 없었다

 

관우가 형주에서 손권의 군대인 손오 군대에 

습격당하면서 형주를 잃고 유비는 성도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황제가 된 후에 관우의 복수를 위해 군대를 동원해

동쪽으로 내려간다

출발하기 전에 장비도 명령을 받고 수하의 군대를

동원해서 함께 상강으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떠나기 전에 부하인 호위 장수에게

죽임을 당한다

 

구전에 따르면 장비가 남긴 명소가 있다

성도에서 북쪽으로 진령을 넘어 장안,

지금으로 치면 시안까지 도착하는 길을

예전에는 '고촉도'라고 불렀다

길이 지나가는 지역이 촉나라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촉도의 양옆에 쭉 가로수가 심겨 있다

현지의 풍문에 따르면 그곳에 도로를 만들고

가로수를 심기 시작한 때가 장비가 파서군에서

태수를 지냈을 때라고 한다

가로수를 심은 이유는 길을 걷다 뜨거운 햇볕과

비를 만나면 힘들어 그늘을 만든 것이다

 

게다가 장비가 정한 규칙이 있었다

나무를 심어야 할 뿐만 아니라 현지 정부의

전직 관리와 새로 부임한 관리가 인수인계할 때

업무상의 절차가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4년 동안 이곳에 나무가

몇 그루 있었고 새로 몇 그루를 심었으며

총 몇 그루가 있는지 조사해야 했다

 

고촉도 양쪽에는 현재까지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 남아 있다

취운랑이라고 지금은 관광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유명한 삼국시대의 명소로 지금까지도 8천여 그루가 있다

취운랑의 측백나무는 장비가 가장 먼저 심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장비백이라고 부른다

 

 

 

 

 

(2024. 11. 21. 방송)

 

9강  조운 (상) 유비의 후계를 지키다

 

 

 

조운(미상~229년), 촉한의 장수

 

조운의 자는 자룡(子龍)이다

조운은 동한 기주 상산군 진정현 사람이다

조운이 유비를 알게 된 배경은 유비가 사형인 

공손찬 밑에 있을 때였다

 

대업에 실패했던 초기 유비는 공손찬에게 의탁한다

공손찬은 유비를 기주로 보낸다

또 조운을 불러와 기병을 통솔하게 한다

초기에 기주의 군정 장관은 한복이었다

군웅할거 시대에 병사를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려고 할 때

연합군의 수장인 원소가 정당하지 않은 수단을 써서

한복을 죽인다

그리고 기주라는 큰 땅을 빼았았다

 

기주는 큰 주였기 때문에 생산량이 풍부하고 인구도 많았다

원소의 행동에 수많은 사람이 불만을 품었다

당시 조운의 고향인 상산군은 기주 아래에 있었다

자신이 원래 섬기던 한복을 새로 온 원소가 죽여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조운은 의용군을 조직해 원소를 토벌하려고 했다

 

그런데 공손찬도 유주에 있을 때 원소와 갈등이 있었다

공손찬은 원소를 반대하는 조운 세력과 접촉하게 된다

그때 공손찬의 부하가 바로 유비였다

유비와 만난 조운은 두 사람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조운은 유비가 사형인 공손찬보다

앞날이 더 창창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유비는 힘이 약했기 때문에 조운을 끌어들여서

함께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의견이 일치했고 

조운은 유비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삼국지> 조운전의 조운에 대한 평가에

두 개의 특별한 키워드가 들어가 있다

충성 / 용맹

조운이 충성스럽고 용맹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조운이 유비 휘하에서 충성을 다하는 건

엄청난 의미가 있다

애초에 조운이 유비에게 충성한 것 자체가

엄청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유비에게 힘이 되는 부하 장수는

관우와 장비밖에 없었는데 이젠 조운까지 있는 것이다

'구두장이 셋이 제갈량보다 낫다'

중국 민간에서 전해지는 말로 두 맹장인 관우와 장비에

조운까지 더해졌으니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게다가 조운은 부대까지 데려왔다

평범한 부대가 아닌 기병을 말이다

그 당시 유비에게 없었던 병종이다

유비 군대의 기본적인 규모가 갖춰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운이 온 건 특별한 의미가 있다

유비에 대한 조운의 충성심은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충분히 드러난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추격할 때이다

유비와 제갈량은 남쪽으로 철수했었다

조조는 기병 부대를 보내 밤낮으로 300리를 쫓아갔다

그렇게 유비 일행을 거의 다 따라잡았다

그때 장비는 뒤를 막고 있는 있었다

조운이 맡은 임무는 유비의 가족을 지키는 거였다

유비의 아내와 첩실, 갓 태어난 아들인 유선을 지켜야 했다

 

조운의 외모는 역사서에 따르면 신장은 8척이며

용모가 우람하다고 되어 있다

(지금으로 치면 184cm)

제갈량도 키가 8척이었다

촉한 조정을 보면 문관 쪽에는 제갈량이 있고

장수 쪽에는 조운이 있는데 두 사람 다 키가

8척이니 아주 장관이었다

 

당시 조운의 임무는 사실 어려운 거였다

약한 아이와 여성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말을 탈 줄 모르니 힘겹게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쫓아오는 추격병을 피하기 매우 어려웠다

그때 조운은 유비의 가족을 데리고 어렵게 

옆길로 이동해 인적 드문 동쪽으로 갔다

정방향으로 난 큰길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유비 본인조차 자기 가족을 포기했다

혼자 말을 타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조운은 그저 부하로서 유비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유비의 가족을 보호하면 걸어서 간 것이 아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약자를 돌보는 빛나는 면도 있었다

 

유비는 대군을 이끌고 익주로 가서 본인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개척했다

당시에 유비는 손권의 여동생인 손부인과

결혼했는데 유선이 어려서 손부인이 대신 키웠다

유비가 서쪽에 있는 익주로 가자 손권이

형주를 내놓으라고 하지만 유비는 주지 않았다

유비는 원래 손권이 차지하려 했던

익주를 함락시켰다는 말을 들었다

손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손권이 익주를 원했는데 형주를 지나지 못하게 하고는

유비가 가서 함락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권은 자기 여동생을 강동으로 데려간다

매부라는 사람이 의리 없이 구니까 손권이

우선 여동생을 데려간 것이다

그 후 손권은 유비와 전쟁을 치르려고 한다

무력으로 형주를 빼앗으려던 것이다

이리하여 손부인은 유선을 데리고 강동으로 돌아가려 한다

배를 타고 공안에서 떠나려 한다

 

손부인이 길을 떠나자 바로 누군가가 조운에게 보고했다

유비가 형주를 떠날 때 조운에게 임무를 줬는데

자신의 뒤를 잘 지켜 달라는 거였다

특히 가족을 말이다

조운은 손부인 혼자 강동으로 돌아가는 건 상관없지만

어린 주공까지 데려갈 순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유비가 일궈 낸 권력을 누가 물려받겠는가

그래서 조운은 장비를 불러 쾌속선을 탔다

당시 쾌속선은 비교적 자그마한 배였다

그렇게 강을 따라 손부인을 쫓아갔다

마침내 장강 중류에서 손부인을 따라잡았다

조운은 손부인에게 '어린 주공은 남겨 두라'고 말한다

 

역사책에 보면 손부인은 무술을 연마한 사람이다

유비랑 결혼할 때 신방에 손부인이 강동에서 데려온

몸종 아환이 있었다

이들이 다 단도를 들고 한쪽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그래서 막 결혼식을 마친 유비가 신방에 들어서서

이를 보자마자 마음속으로 흠칫 놀랐다고 한다

유비도 전장에서 수도 없이 검을 봤지만 신방에서

번쩍 빛나는 칼날을 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순간 놀랐다가 나중에야 진정되었다고 한다

 

손부인의 오라버니 중에서도 특히 큰 오라버니인

손책은 무예가 상당했다

가풍이 무예를 숭상했고 손부인도 무예를 좋아했다

손부인이 유선과 함께 떠나려는데 조운과 장비가

데려가겠다고 찾아 왔을때 유선을 주지 않으면

장강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손부인 쪽은 시녀가 전부였고 조운과 장비는 

군대를 대동했으므로 상황을 따져 보면 안 싸우는 게 좋다

어차피 유선은 손부인의 친자식이 아니다

손부인은 유선을 조운에게 건네준고 조운은 무사히

유선을 본진으로 데려온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원래 손씨 집안과 유씨 집안은

아름다운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였는데

장강에서 그 인연의 실이 영영 끊어져 버렸다

유비가 대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아내와 아들이

세, 네 번 포로가 된다

그래서 후계자로는 유선만 남아 있었다

만약 손부인이 유선을 강동으로 데려가면

훗날 유비가 고생 끝에 성도에서 황제가 되어도

후계자가 없으니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조운이 한 일은 유비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

보여 준 거라고 할 수 있다

 

조운이라는 장수는 전장에서 싸울 때는 아주 용맹했고

유비에게는 매우 충성했다

그래서 역사책은 조운을 충성스럽고 용맹하다 평가한다

조운은 유선을 두 번이나 지켰다

당시 당양 장판파에서 조조군의 추격을 피할 때와

손부인의 손에서 구해 온 것이다

조운이라는 장수의 충성심은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실제 행동으로 보여줬다



 

 

 

(2024. 11. 22. 방송)

 

10강  조운 (하) 한중전투의 공영계

 

 

 

⊙ 조운의 전장에서의 용맹함

 

한중을 빼앗은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이 되었다

유비가 한중을 빼앗자 조조는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중요한 곳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유비는 한중을 공격할 때 그저 땅만 빼앗아 간 게 아니다

조조가 매우 중시하고 아끼며 사이가 좋은 장수를

한중의 정군산 밑에서 죽였다

바로 촉한의 유명한 5대장군 중 한 명인 황충이

하후연을 죽인 것이다

하후연은 조조와 동년배이자 친척 관계였다

조조는 하후연을 위해 복수하고 싶었다

그리고 전술 요충지인 한중을 되찾고 싶었다

 

'군대가 움직이기 전에 군량을 먼저 준비한다'

이건 중국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말이다

식량이 없으면 군대를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조조는 한중을 되찾기 위해

우선 대량의 식량을 운반한다

진령의 산간 대로에서 산간 오솔길의 

남쪽 입구로 옮겼다

그리고 대군이 도착하면 대규모 공격을

벌이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조운 일행이 취한 전략은 

바로 그 식량을 약탈하는 거였다

 

조운과 황충은 식량을 약탈하러 간다

조조는 막강한 군대를 보내서 식량이 보관된 곳을

지키게 한다

하지만 용맹하게 싸우는 조운과 황충은

상대 수비군을 물리치고 식량을 약탈한다

조운은 행동이 빨랐다

그런데 본영지에 와 보니 황충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조운 입장에서 남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조운은 그렇게 냉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우를 살뜰히 살피는 사람이었다

황충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조운은 말에 올라 본인의 부대를 소집했다

그리고 적진에 다시 쳐들어가서 한 번 더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결국 황충을 데리고 돌아온다

돌아오다 본영지를 눈앞에 뒀을 때이다

조운의 부하 중에 어느 한 장수가 있었으니

성이 장이라서 장저라고 불렸다

그가 적의 추격병이 쏜 화살에 맞아서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장저는 조운에게 살려달라고 외쳤다

전쟁터에선 사망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장저가 운이 나쁘게 화살에 맞았지만

조운이 신경 안 쓰고 본영지로 돌아가도

누가 뭐라고 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운은 부하에게 냉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또 호위병을 데리고 말머리를 돌려 돌아간다

그리고 장저를 데리고 함께 본영지로 돌아왔다

 

본영지로 들어서니 남아서 지키던 군대가

본진의 문을 닫으려고 했다

조운이 큰 소리로 명령한다

"본영지의 대문을 닫지 말라

어떤한 공격 신호도 내지 말라"

그때 공격 신호라고 하면 주로 북을 치는 거였는데

북을 못 치게 한 것이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게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본영지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쫓아왔다

그런데 조조가 보기에 뭔가 이상하다

조운이 돌아갔는데 본영지의 대문이 열려 있고

조운 군대는 인기척도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문이 닫혀 있으면 그 앞까지 추격해 가서

계속 공격을 하는데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거 조운의 함정이 아닐까?'

'날 조운의 본영지로 유인하려는 걸까?'

'얼마 전에 아끼는 장수 하후연이 적을 얕봤다가 유비의 부하인

황충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지금 내가 쫓아가면 나도

큰 손해를 보지 않을까?'

그래서 조조는 말을 돌려서 본인의 대군을 이끌고 돌아간다

 

사실 당시 조운의 병력은 조조보다 적었다

만약 조운이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뜻으로

대문을 닫아 놨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조조가 강력한 병력으로 공격했을 테고

도리어 조운이 본인의 본영지를 안전하게

지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운은 대담한 사람이었다

대문을 열어 두고 적이 들어오게 한 것이다

그랬더니 조조가 떠나 버렸다

이게 바로 조운이 전장에서 보여 준

가장 용맹하고 대담한 전투였다

적군을 처치한 숫자나 전투 성과가

엄청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조운이 보여준

용맹함은 다른 장수의 그 어떤 전투에도

뒤지지 않는다

 

 

⊙ 조정의 대청에서의 용맹함

 

조운의 대청에서 보여준 용맹함은

전장에서 보여 준 모습 못지않았다

당시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성도를 함락시켰다

성도는 당시 익주의 군사와 행정 중심지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익주 군정의 관청에 포함된 창고에는

대량의 황금과 백은, 식량, 화폐가 있었다

성도를 함락시킨 유비는 공을 세운 신하에게

큰 상을 내리기로 한다

일등 공신으로 제갈량, 관우, 장비와 같은 자들이다

빛나는 금과 은이 눈앞에 있으니 이때 일부 사람들의

탐욕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유비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금과 은을 나눴지만 성도에는 수많은 빈집과

주인 없는 경작지, 영주들의 영토도 있으니

그것도 다 같이 나눕시다"

조운은 조정에서 수많은 대신과 유비에게

그건 절대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성도에 온 이유는 한나라 왕실을 다시 

부흥시키고 간웅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성도에 왔는데

나라의 곳간뿐만 아니라 백성의 것까지 나눠

가지는 건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백성의 지지를 받아야지만

형주에서 발을 붙일 수 있고 그래야 가장 처음에 세운

정치적인 목표도 끝까지 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조운은 결사코 반대한다

 

당시에 형주는 포위당한 상태로 전쟁이 이어졌고

수많은 형주 백성은 도망친 상황이었다

그래서 빈집이 생기고 성도 교외 지역에 주인없는

땅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주인들은 조금 멀리 피신한 거였다

훗날 지방 호족을 무너뜨리고 땅을 나눈 것처럼 되는 것이다

조운은 대업을 위한 최초의 정치적 방침과

완전히 상반되는 행동이기에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조운을 의견을 들은 유비는 차분하고 꼼꼼하게 생각해 본다

결국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조자룡의 의견이 옳다, 그 뜻에 따르겠다"

 

전장에서 공영계를 쓸 때 상대는 적이다

이러한 관계는 아주 단순하다

죽음만 두려워하지 않으면 된다

조정에서 남의 뜻을 반대하는 것은 동료가

큰 돈을 버는 걸 반대하는 것이다

골치 아픈 후폭풍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재산을 불리고 싶어 하는 동료들 앞에서

단호하게 그 기회를 막아 버렸으니 앞으로

그 사라머에게 냉대받고 배척당하고 소외당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조운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돈에 눈이 멀어서 초심을 잃는 사람도 아니었다

성도에서 촉한 정권이 비교적 순조롭게 세워지고

훗날 유비가 성도에서 순탄하게 제위에 올라

촉한을 세울 수 있었던 건 사실상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조운이 조정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제안을 한 것과

연관이 있다

만약 그때 다들 금은보화를 나눠 가졌다면

촉한 정권이 성도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을까?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 이 5명의 영웅은

삼국시대라는 거대한 사회와 정치에서 큰 변화를

일으킨 참여자이다

우리는 거대하고 유구한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

5명의 인물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조조와 손권도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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