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식과 지식 사이

EBS 위대한 수업 4 팡 베이천 (삼국지 촉한의 영웅들) 1~5강

by 상팔자 2025. 1. 11.
반응형

EBS 위대한 수업 4 팡 베이천 (삼국지 촉한의 영웅들) 1~5강

위대한 백스물 일곱 번째 강연 '삼국지 촉한의 영웅들' (시즌 4 일곱 번째)

 

 

팡 베이천(Fang Beichen) 

중국 쓰촨대 역사문화학 교수

청두무후사박물관 학술위원

<삼국지 역주>

<삼국명장> 등 집필
 



 

 

 

(2024. 11. 11. 방송)

 

1강  유비 (상) 자주 실패했던 영웅

 

 

 

◐ 촉한의 창업 영웅들을 이끈 인물 유비 ◑

 

유비(161년~223년), 중국 촉한의 초대 황제

유비의 자(字)는 현덕이고 그의 고향은 탁군의 탁현이다

현재 허베이성 줘저우시이다

유비는 북부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서 기록을 기준으로 유비 집안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전한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으로 나온다

※ 유승(미상~기원전 113년): 중국 전한의 황족

따라서 유비는 전한 황족의 후예가 될 것이다

전한의 유씨 황족은 매우 큰 가문으로 뻗은 가지가 많다

유비는 후한 말기에 태어났는데 정세가 요동치는

시기로 천하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유비는 어리고 젊었을 때부터 몇 가지 특징을 보였다

♧ 외모의 특징

① 큰 키 약 174cm (7척 5촌)

② 큰 귀

③ 턱수염이 별로 없음

 

유비가 황실의 후예이긴 하지만 먼 방계이기 때문에

전한 경제 때부터 유비의 세대까지 꽤 멀었다

유비의 가문 중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비교적 작은 관직을 지냈을 뿐이었다

유비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워

어머니와 서로 의지하며 살게 된다

유비의 어머니가 돗자리를 팔고 신발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막노동을 하거나 돈 안 되는 장사로 생활비를 번 셈이다

 

유비를 삼국시대 다른 리더들과 비교한다면 

유비의 창업 조건이 최악이었다

정치적 자원이 부족했고 가문의 힘도 없었다

아버지가 현급 관리였지만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치적 자원이 있을 리 만무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친형제도 없었다

창업을 시작하려고 해도 가문에 유비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 청두 무후사: 촉한의 창업 영웅들을 모신 사당,

유비와 제갈량의 묘가 있다

 

그래서 유비가 아주 젊었을 때 관우,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었던 것이다

본인 가문의 힘이 약하니 성이 다른 사람들 중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유비가 10대 청소년이던 시절 이웃 아이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유비네 집 옆에 엄청나게 큰 뽕나무가 있었다

그 길이가 몇 장에 달했는데 지금으로 하면 10여 미터 정도였다

잎도 아주 무성했는데 나무 머리 쪽 잎들이 아주 풍성했다

멀리서 보면 이와 닮은 것이 있었다

당시 황제가 타던 호화로운 마차였다

무성한 잎이 차개처럼 보인 것이다

 

 

당시 황실에서 사용한 수레를 보면 수레 윗부분에

덮개가 있어서 화려한 깃털로 장식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함께 즐겁게 놀았던 그날

유비가 큰 뽕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커서 저렇게 풍성한 차개가 달린 우보개차를 탈 거야'

 

당시 아이들은 우보개차가 뭔지도 몰랐다

유비는 다른 어른한테서 황제가 우보개차를 탄다고 들은 것이다

유비가 그런 말을 하자, 옆에 있던 집안의 어른이 경악했다

먼 친척인 이 사람이 이 말을 듣곤 유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런 식으로 허튼소리 하게 두면 안 됩니다'

'황제의 우보개차를 타고 싶다 말하면 관청에서 엄벌을 내릴 거예요'

'자칫하다간 목이 날아갈 수 있으니 입 단속시키고 당장 공부시키세요'

그래서 유비의 어머니는 어렵게 번 돈을 한데 모아

유비를 대학자에게 보내는 데 쓰게 된다

 

※ 노식(미상~192년): 중국 후한의 학자

이 대학자의 이름은 노식인데 유비는 그 문하에서 공부했다

이곳에서 함께 공부하던 선배 중에 공손찬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추후 유비를 돕는 인물이다

삼국지 전체 기록에 남아 있는 유비의 창업에 대해 보면

유비는 자신의 창업이 기본적으로 삼국의 적벽대전 전후로

나뉜다고 늘 언급했다

 

엄밀히 따지면 적벽대전 전년

적벽대전이 서기 208년이니까 전 해는 207년인데 

그때가 바로 유비와 제갈량이 만나고

제갈량이 유비를 섬기겠다 말한 시기

제갈량을 만나기 전까지 유비의 창업 과정은 무척 고달팠다

후한 말기 황건적을 진압할 때부터 유비의 창업은

시작됐는데 당시 유비는 황건적 진압에 참가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이후 유비는 또 다른 방법으로 창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조금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 금방 실패해 버린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서 창업하고 성공한 뒤 또 실패했다

쉽게 말하면 오뚝이 같은 것이다

악착같이 버티고 계속되는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

 

★  유비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중요하게 작용한 건 유비가 가진 몇 가지 우수한 자질이다

1. 악착같은 인내심

2. 냉철한 반성

실패하고 나면 유비는 왜 실패했는지

실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분하게 생각할 줄 알았다

3. 인재를 중시

유비의 마지막 업적은 이 세 장점이 합쳐져 가능했다

 

창업에 실패를 거듭했던 유비는 유표가 있는 형주로 도망갔다

일종의 지원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서 7년을 지내면서 이뤄낸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 번은 유표의 연회에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가

중간에 경의(更衣)를 하러 나간 적이 있다

여기서 경의는 화장실을 간다는 말이다

화장실에 가서 쪼그려 앉아 볼일을 보고

일어서려는데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허벅지를 만져봤다

오랫동안 전장에서 말을 타고 싸우느라

양쪽 허벅지에는 근육이 단단히 잡혀 있었는데

이제 흔적 없이 거의 사라져 버렸고

실제로 남은 건 매우 두꺼운 지방층이었다

당시 유비는 화장실에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때 유비의 나이는 이미 47세였다

 

47세의 나이에 여전히 남의 지역에서 주는 밥을 먹고

남의 도움에 기대서 사는 처지였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한바탕 통곡을 했던 것이다

유비가 연회로 돌아오자 유표가 물었다

'왜 눈물을 흘린 표정입니까?'

유비가 말했다

'오랫동안 허송세월했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픈 마음에

눈물이 좀 났습니다'

이 일 이후 유비는 냉철하게 반성하기 시작했다

'스물네 살 때부터 마흔일곱 살 때까지 열심히

노력했는데 23년 동안 노력하면서 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인가'

유비는 좌절하더라도 남을 탓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원천우인하지 않았다

※ 원천우인(怨天尤人)이란, 하늘을 탓하고 타인을

탓하면서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유비는 자신 안에서 원인을 찾았다

 

마침내 유비는 깨닫는다

'내 곁에 책사가 없기 때문이구나'

'내게 부족한 건 발전 전략의 큰 방향을 제시하고

전략을 수립해 줄 인물이구나'

그래서 수소문하여 알게 된 인물이

아주 유명한 와룡 선생이었다

바로 제갈량이다

※ 제갈량(181년~234년): 중국 촉한의 재상

제갈량은 형주의 행정 중심지인 양양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진 융중이라는 지역에 있었다

제갈량은 여기서 10여 년간 농사를 짓고 있었다

제갈량은 한편으로 항상 바깥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자신이 보좌할 만한 인물을 기다린 것이다

 

유비는 제갈량을 연이어 세 번을 방문했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세 번 만에야 제갈량의 얼굴을 본 것이다

유비를 만난 제갈량은 그에게 향후 발전 전략

계획을 제공한다

이 계획은 모두 <삼국지>의 <제갈량전>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제갈량과의 만남은 유비의 창업에 매우 큰 역할을 한다

 

 

 

 

 

(2024. 11. 12. 방송)

 

2강  유비 (하) 삼고초려와 수어지교

 

 

 

☆  누가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한 걸까?

 

당시 유비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양양을 대표하며 교양과 연륜을 겸비한 사마휘였다

유비는 사마휘에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제가 지금 창업을 잘해 보려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마휘가 이렇게 말한다

'창업을 하기 위해 어떤 실무를 봐야 하는지를

이미 노쇠해 버린 내가 어찌 알겠는가'

여기서 실무란 , 마땅히 해야 할 정치상의 

사무를 말한다

'나도 모르겠네.

실무를 정말 알고 싶거든 마침 이곳에 와룡이 있다네'

 

유비는 그 이름을 듣고 와룡이 누군지 물어본다

사마휘는 그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유비는 양양에 살고 있던 다른 지인에게 또 묻는다

바로 , 당시 양양에 살고 있던 유명인 서서이다

서서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에게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있다고 들었네

와룡이라 불리던데 그가 제갈공명이 맞는가?'

'물론입니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지요.

그를 만나고 싶으십니까?'

유비가 만나고 싶다고 대답한다

서서는 유비에게 제갈량을 강력히 추천하며

제갈량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그를 만나면

뭘 해야 하는지 귀띔한다

 

사마휘 어르신도 추천했고 서서도 추천했으니

공명이라는 자가 분명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유비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정말 대단한 인재라면 자기를 위해 일해 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quot;alt&quot;:&quot;삼고초려&quot;

 

그렇게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러 세 번을 찾아갔고

결국 만나게 된다

제갈량은 유비를 보자마자 향후 창업을 위한

발전 전략 계획을 제시한다

 

 

★  유비의 삼고초려 끝에 이뤄진 만남

제갈량은 왜 유비와 협력하기로 한 걸까?

 

후세에 이뤄진 연구에서는 유비와 제갈량이 만나는

대목에서 유비가 여러 번 찾아간 행동을 칭찬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두 사람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1. 나이

당시 유비는 47, 제갈량은 27

유비가 제갈량보다 스무 살 위니까

유비는 까마득한 대선배이고 제갈량은 후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비는 조금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2. 경력

유비는 24살에 창업을 시작했고 관직에 올랐다

47살까지 총 23년이나 일했다

반면 제갈량은 줄곧 융중에서 밭을 갈며 살았다

한 번도 관직에 오른 적 없고 관리나 병사로 지낸 적도 없다

 

3. 지위

후한 조정 아래에는 13개의 주가 있었는데

당시 주는 현재 성의 면적보다 조금 더 컸다

그래서 주의 행정 장관이 되는 건

매우 대단한 일이었다

유비는 예주목이라는 직책을 지냈다

당시 주의 행정 장관은 호칭이 두 가지였는데

나이가 젊고 경력이 짧으면 '자사(刺史)'라고 하고

경력이 풍부하고 나이도 많으면 '목(牧)이라 불렀다

매우 풍부한 이력 덕분에 당시 유비는 예주목에 임명된다

행정 차원에서 예주목으로 지낸 경력이 있다

그리고 군사 차원에서는 군사를 거느리며 싸웠고

후한 조정에서는 유비에게 좌장군 직함을 정식으로 내렸다

 

당시 후한 조정의 고급 장군 중 최고위직은 대장군이었다

그 아래로 표기장군과 거기장군이 있고

전장군, 후장군, 좌장군, 우장군의 사방장군이 있다

이것이 바로 고급 장군에 속하는 계급이다

여기서 유비는 좌장군을 지냈다

만약 유비와 제갈량의 나이, 지위, 경력이 비슷했다면

유비가 세 번을 찾아갔을 때 제갈량이 감동하고

격려를 받는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본인보다 나이와 경력이 많고

정치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자신의 집에 온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이 <출사표>에 이렇게 쓴 것이다

※ 출사표: 신하가 적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황제나 왕에게 올리던 표문

 

&quot;alt&quot;:&quot;제갈량의 출사표&quot;

 

정말 감동했고 격려를 받았던 것이다

제갈량은 선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유비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유비를 섬기기로 다짐했다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에는 참 많은 뒷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유비가 가까스로 제갈량을 얻었는데

그 효과는 어땠을까?

207년 두 사람이 만난 뒤, 제갈량은 유비를 따라

세상에 나오게 되고 유비를 도와 계책을 세운다

이듬해인 서기 208년에는 조조와의 전투로 남하하게 된다

이때부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만약 제갈량이 유비를 보좌하지 않았다면

조조가 이듬해 북부에서 쳐들어왔을 때 형주에 있던

유비는 허겁지겁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주저앉았을 테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손권과 결탁해 조조와 맞서 싸우려 했고

손권도 유비와의 연합을 원했는데 제갈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가 제갈량을 얻고 나서 대업의 준비 과정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제갈량이 보좌한 이후 상승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때 유비는 네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  첫 번째 계단, 적벽대전(赤壁大戰)

제갈량은 유비에게 이렇게 간청한다

'주공, 저를 강동으로 보내주십시오.'

'손권 장군을 설득해 동맹을 맺겠습니다.'

이때 제갈량은 외교관의 역할로 손권에게 찾아간다

역시나 손권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하고

손오와 연합해 적벽대전을 멋지게 치르게 된다

 

유비에겐 작은 근거지가 있었는데 얼마 안 가 빼앗기고

이어서 다른 근거지마저 빼앗기게 된다

확고한 근거지를 갖고 있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적벽대전을 치른 이후 형주 남부의

4개 군을 점령하게 된다

 

&quot;alt&quot;:&quot;유비의 4개 군&quot;

 

♣  두 번째 계단, 익주 진출

적벽대전 이후 시간이 좀 지나 익주로 진출할 기회를 맞게 된다

유비는 익주에 들어간 뒤 성도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성도를 치는 데 실패하자 급히 제갈량을 부른다

장비와 조운을 데리고 형주에서 출발해 장강을 따라 올라간다

그렇게 익주 군대를 증원하게 된다

 

&quot;alt&quot;:&quot;익주 군대 증원&quot;

 

형주는 관우가 지키도록 했다

그 결과 제갈량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성도를 무너뜨린다

성도를 정복한 뒤 익주에서 북부 한중군 제외하곤

대부분 지역을 유비가 점령하게 된다

따라서 유비는 형주 남부 4군을 점령한 뒤

익주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면서 

자신의 근거지를 넓히게 된 것이다

 

♣ 세 번째 계단, 한중 공격

유비는 대군을 거느리고 북부로 가서 한중을 공격했다

한중은 조조가 장악하고 있던 곳이다

후방은 제갈량이 지키고 있었다

제갈량은 후방에서 군량 공급선을 확보했다

유비는 한중군까지 점령해 익주 전체를 차지하게 된다

이때 유비는 한중에서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나라의 장군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왕의 자리로 올라간 것이다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유비가 인재를 중시했고 최선을 다하여 진정성 있게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유비는 인생의 전반부에 계속 좌절한다

가문의 세력이 약했고 정치적 자원이 빈약했으며

경제력도 약했다

하지만 세 가지 역량으로 자신의 한계에 맞섰다

그건 바로 악착같이 버티는 것이었다

목표를 정한 다음 꼭 이루겠노라 마음먹고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았다

유비는 어떤 일이 닥쳐 좌절을 겪게 됐을 때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다른 데서 원인을 찾지 않고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곤 했다

그런 판단력이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을 찾아갈 수 있었으며

심지어 두 사람 사이의 큰 격차를 개의치 않고

제갈량의 집에 찾아갈 수 있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재를 존중하는 유비의 모습은

우리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2024. 11. 13. 방송)

 

3강  제갈량 (상) 천하삼분지계

 



제갈량(181~234), 촉한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제갈량(諸葛亮)촉한 왕조가 세력 확장을 하는 데에

전반적인 전략을 짠 인물이다

제갈량의 성은 '제갈(諸葛)'인데 복성이라고 

두 글자로 된 성을 말한다

'제갈'은 성이고 '량'이 이름이다

자는 '공명(孔明)'인데 여기서 '공'은 매우라는 뜻이다

제갈량의 '량'이 빛을 뜻하는데 빛이 매우 밝다는 뜻이다

 

제갈량은 전한 시대 낭야국 양도현 출신이다

(지금의 산둥성 이난현)

제갈량의 가문도 대대로 관리 집안이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러 융중으로 갔다

제갈량에게 조언을 구하러 간 것이다

유비가 말한다

"나는 한나라 왕실의 후예인데 지금 상황을 보면

황제께서 간신에게 붙잡혀 있는 꼴이요"

여기서 간신은 조조를 가리킨다

"한나라 왕실이 쇠퇴하고 우리 왕조의 힘이 약해지니

모든 사람들 앞에서 대의를 펴고 우리 왕조를 부흥시키고 싶소"

"그대 생각에 나처럼 좌절을 반복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소?"

유비의 진실한 자기소개를 들은 제갈량은 유비에게

긴 답변을 한다

이 답변은 무려 290여 자가 넘는다

 

당시 제갈량이 한 말은 <삼국지> 제갈량전에

아주 명확하게 기록돼 있다

후대에는 이 답문을 '융중대' 또는 '융중대책'이라고 한다

※ 융중대(隆中對) 또는 융중대책(隆中對策)

: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안한 계획안

: 손권과 동맹을 맺고 조조를 막는 전략을 골자로 함

당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장소가 융중이었다

융중은 형주의 관할하에 있었다

 

⊙ 융중대책의 내용

제갈량은 먼저 천하의 형세부터 분석해 줬다

"북쪽에 자리한 조조는 천자를 옆에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니 당분간 장군께서 조조를 제거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조조가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을뿐더러 조조의 군대는 힘이

막강하고 조조에게는 그를 섬기는 여러 인재가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조조를 단기간에 집어삼키는 건 불가능하니

시기를 좀 늦춰야 합니다"

 

그는 북쪽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동쪽에는 손권이 있다

강동에는 손권이 있었는데 이미 3대에 걸쳐

강동에 있었다

(손권의 아버지 손견, 손권의 맏형 손책, 손권)

"3대에 거쳐 강동을 관리했기 때문에 권력의 뿌리가 깊습니다

게다가 장강이라는 천연 요새까지 있으니 수중에 가득한 인재들

모두 손권을 지지하고 있지요"

"이런 상황에선 동쪽의 손권을 외부의 동반자로 삼는 게 좋습니다"

"손권을 억지로 무너뜨리지 않아야 합니다"

"어차피 강동의 땅을 점령하려 해도 방도가 없습니다'

 

이렇게 북쪽과 동쪽 상황을 얘기한 다음

가까운 지역에 대해 이야기한다

올바른 세력 확장의 방향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형주를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단계 진일보할 수 있는 곳이 서쪽입니다"

"장군께서는 적의 힘이 강한 곳이 아니라 적이 없는

약한 곳으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형주는 길이 사방으로 뻗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니 

남쪽으로는 남해까지 통합니다"

"게다가 장강이 있고 면수까지도 막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넓은 땅은 물자도 풍부하고

민중도 많지만 형편없는 주군이 있습니다"

 

당시 형주를 다스리는 주군은 유표였다

유표는 능력이 평범했다

게다가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그러니 장군이시여 가장 먼저 하셔야 할 일은

형주를 취하는 것이옵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이 현재로서는 최적의 땅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익주를 칠 방도를 강구하셔야 합니다"

"익주를 다스리는 유언과 유장 부자 역시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고 평범한 자들이라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익주는 땅이 굉장히 넓고 물자가 풍부하며 

풍요의 땅이라는 명성이 자자합니다"

"그러니 이 두 지역인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그런 다음 안으로는 정치를 잘 돌보고 밖에서는 인재를

대거 영입해 장군의 정권 구조를 강화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유리한 기회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여기서 유리한 기회란 바로 북부의 조위 정권이

세력을 확장해 나갈 때 조조의 수하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지에 따라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천하에 유리한 변화가 생기면 대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동쪽 형주의 병력을 이끌고 완과 낙으로 향하게 하십시오"

완은 남양군의 중심지인 완현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허난성 난양시)

낙은 낙양을 뜻한다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두 갈래로 북쪽의 조위를

협공하는 형식을 취하십시오"

"동쪽에서는 형주를 통해 북진하고 서쪽에선 장군께서 직접

익주의 강력한 부대를 이끌고 진령을 넘어 관중으로 들어가십시오"

"두 갈래에서 북부의 조위를 협공하는 겁니다"

 

&quot;alt&quot;:&quot;북부의 조위를 협공&quot;

 

"만일 성공하신다면 장군께서는 한나라 왕실

부흥은 물론 간신을 소탕하겠다는 목표를 이루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갈량은 유비를 만나서 세력 확장을 위한

전반적인 전략을 설계해 준다

 

비록 제갈량의 세력 확장 전략은 296자밖에 안 되지만

정세에 대해 굉장히 정확하게 분석했다

정세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유비가 앞으로

나아갈 구체적인 방향도 단계별로 설명했다

유비는 그동안 이런 세력 확장 전략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제갈량의 말을 끝까지 들은 유비는 역사서에 나온 대로

표현하자면 엄청 기뻐하면서 딱 한 마디로 말했다

선(善)

'선'은 훌륭하다는 말이다

유비는 이 모든 것이 그저 새로웠다

이때부터 유비가 '융중대책'을 자신의 세력 확장 정책으로

삼으면서 훗날 눈부신 성공을 거두게 된다

 

♧  어째서 제갈량은 자신을 찾은 유비에게 세력 확장

전략에 대한 설계뿐만이 아니라 함께 세상으로 나간 걸까?

제갈량이 유비를 평생 섬긴 이유는 과연 뭘까?

 

제갈량은 한나라 말기의 전란으로 백성들이

고통받는 걸 목격했다

자신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후한 조정이 다시 분발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부패하고 방탕한 황제 

두 명의 후한 황제 중 하나는 영제인데 악명이 높았다

그들로는 답이 없으니 황족의 또 다른 후예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황실의 후예인 유비가 한나라 왕실의 부흥을 이루고

간신을 소탕하는 포부를 갖고 있었기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온 제갈량의 지지를 받았다

 

제갈량은 유비가 백성의 희망에 부합하며 정통성과 

정당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번 생에는 늙어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떠나지 않거나

이곳을 떠나 관직에 올라 관료 사화에 들어가고 업적을 쌓아

우리 가문의 영광을 이어나가야겠다'

그러려면 유능하고 뛰어난 적임자를 맞이하여

보좌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비가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제갈량이

그 정치적 목표를 지지했다

그리고 유비는 겸손하고 인재를 중시했다

그래서 신분과 지위, 경력의 큰 격차를 신경 쓰지 않고

제갈량을 찾아갈 수 있었다

27년 동안 제갈량은 유비의 정치 목표에 감동과

영향을 받았고 평생 유비를 섬겼다

 

 

 

 

(2024. 11. 14. 방송)

 

4강  제갈량 (하) 유비를 도와 대업을 이루다

 

 

 

▣  제갈량은 대업을 이루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고

어떤 성과를 이뤘나?

 

제갈량은 두 가지를 준비했다

첫 번째로 많은 친구를 사귀어 외부 정보를 얻었다

제갈량은 먹고살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양양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진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융중은 시골이었기 때문에 친구를 많이 사귀지 않았다면

밭을 갈고 농사짓는 지식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친구들 중에는 양양의 문화계 대선배들도 있었다

제갈량보다 나이도 많고 양양에서 오래 살았으며

현지에서 신망도 두터웠다

 

그중 하나는 사마휘이다

사람들은 존경의 뜻을 담아 그를 수경 선생이라 불렀다

다른 한 명은 바로 방덕공이다

이 두 사람은 제갈량보다 연장자였다

경력도 많고 높은 명성을 가진 거물급 인사들이었다

지식의 원천이 돼준 이들은 제갈량에게 중요한 친구들이었다

두 번째 부류는 바로 동학들로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한 친구들이다

중요한 인물을 꼽자면 서서, 석광원, 맹공위, 최주평이 있다

제갈량은 자신과 같은 또래의 젊은 세대를 통해서도

바깥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물론 서로 학문을 연구하기도 했으나 제갈량에겐

외부 정세의 변화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더 중요했다

 

두 번째로 독특한 독서 방식으로 공부했다

그는 훗날 나라를 다스리고 싶었다

군대를 지휘해서 적과 싸우고 국정을 운영하고 싶었다

이런 경험과 방법들을 유교 경전에선 잘 다루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 가장 많이 들어 있는 책은 바로 고대 역사서이다

<춘추>, <좌전>, <공양전>, <곡량전> 등이

선진 시대의 역사 서적들이다

한대에 와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들 수 있다 

후한의 반고가 쓴 <한서>도 있다 

이런 역사서들이야말로 제갈량에게 가장 유용했다 

 

기본적으로 역사서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과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인물의 일생이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이 인물들의 일생 속에는 어떻게 나라를 운영하고

군대를 이끌었는지 담겨 있다

그들이 직면한 주요 문제를 이떻게 해결했는지

이런 중요한 지식이 상세하게 나온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책에서 말하는 주요 포인트와

가장 큰 의의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제갈량의 독서 방식을 네 글자로 말할 수 있다

관기대략(觀其大略)

향후 자신의 대업을 이루는 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책에서 찾아본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재능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배워서

키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배우는 건 옛사람에게 배우는 것이고 옛사람한테

배우려면 책을 읽어야 하며 책을 볼 때는

자신에게 중요한 부분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제갈량 독서법의 가장 특별한 부분이다

 

제갈량이 27세에 세상으로 나와 54세에 사망했는데

그가 27년간 이룬 중요한 성과와 활약은 최소 11가지나 된다

11개의 임무를 완수할 때마다 제갈량의 역할은 각기 달랐는데

업무마다 필요한 임무가 다르다 보니 역할이 끊임없이 바뀐 것이다

 

☞ 유비가 제갈량에게 대업을 위한 전략을 세워 달라고

부탁하자 제갈량은 바로 전략을 제안했다

이때 역할은 전략 설계자였다

 

조조의 소위 80만 병력이 형주를 침공하자

제갈량과 유비는 서둘러 남쪽으로 후퇴하게 된다

후퇴하는 과정에 제갈량은 유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상황이 급박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살길은 하나입니다

그건 바로 동쪽으로 가서 손 장군에게 도움을 청하는 겁니다

우리는 손 장군과 동맹을 맺고 함께 조조 군대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자 유비가 다녀오라고 한다

그렇게 임무가 주어진 제갈량의 역할은

손권을 설득해야 했기 때문에 외교관이다

손권을 찾아가 설득하고 적벽에서 함께 조조를 쳐부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적벽대전이다

※ 적벽대전: 208년, 중국 천하통일을 목표로 남하하는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 적벽에서 벌인 큰 전투

 

그리고 바로 형주 남부에 있는 4개 군을 분할하고

유비는 그곳에서 촉한 정권의 초기 기반을 다지게 된다

하지만 4개의 군을 점령한 뒤 곧바로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 지역에는 영토 크기만큼이나 인구가 많았다

그런데 촉한의 정부 기관을 세우려면 돈이 필요했다

물자와 식량이 필요했다

정권을 수립하고 행정 기관을 구축하면 관료들

녹봉을 챙겨줘야 하고 월급을 줘야 한다

정권이 수립되면 운영 자금은 어디서 얻어야 할까?

제갈량은 부하들을 데리고 형주의 임증이라는 곳으로 간다

(지금의 후난성 지역)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관리하는 세금 징수 부속 기구를 세운다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에 임명했고 

제갈량은 현지에서 조세를 징수하게 된다

 

나중에 유비가 익주에 들어간 뒤 성도를 공격하는 데

실패하고 제갈량과 장비, 조운에게 성도로 오라고 명령한다

이때 제갈량은 대군 전체를 이끌게 된다

총지휘권이 제갈량에게 있었다

그렇게 대군을 이끌고 익주에 들어가 성도를

공격하고 점령에 성공한다

 

 이후에도 제갈량의 역할은 끊임없이 바뀐다

문관 역할을 하다가 머지않아 장수이 역할을 맡게 된다

촉한 정권이 수립된 후 제갈량은 촉한의 승상이 된다

승상은 행정 관료 중에서 최고 관직에 속한다

현대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승상은 문관이다

제갈량은 촉한 왕조의 전체 행정 시스템을 

매우 안정적이고 순조롭게 운영했다

 

유비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새 군주인 유선을 보좌하게 된다

내정 업무를 잘 처리한 후 군대를 이끌고 남중으로 향해

남중을 평정한다

제갈량은 내정 업무를 처리하고 재원과 물자를 모았다

그리고 충분한 군사력을 확보한 뒤 출사표를 써서

북벌에 나서겠다고 유선에게 청한다

그렇게 제갈량의 역할은 또 바뀐다

명목상 승상이었지만 실제로는 촉한 군대 전체를 이끄는 장수였다

결국 북벌 전선에서 54세의 나이로 오장원이라는 곳에서

병사하게 된다

 

제갈량의 일생은 유비를 만나기 전 27세 이전의

준비단계와 27세 이후 창업을 하게 된 실무단계

나눠 볼 수 있다

독서를 통해 배우고 탐구한 시사점과 경험 같은

유용한 지식실제 업무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전환한 것이다

제갈량은 한평생 유비의 촉한 왕조를 위해 싸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앞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2024. 11. 15. 방송)

 

5강  관우 (상) 백마전투의 일기당천

 

 

 

관우(미상~220년), 촉한의 장수

관우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삼국 인물 중 한 명이자

삼국 영웅 중 한 명이다

관우는 중국 후손들에게 관공(關公)이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역사서에 기록된 관우의 업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역사상의 관공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관우는 다른 이미지도 갖고 있다

바로 문화적으로 재현된 이미지다

역사상의 관공은 높이 쳐 봤자 촉한 왕조의

대장군(大將軍)이었다

물론 관우는 서열이 가장 높은 대장군이었다

그러나 문화적인 관공으로 발전한 후에는

신(神)으로 위상이 달라진다

게다가 관우의 지위는 계속 높아져서 제왕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후세에는 관우를 관공이라고 부름과 동시에

더 존경을 담아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관'은 관우의 성이고 '성'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성품을 뜻한다

중국에서 인정받는 성인으로는 공자가 있다

이렇게 추대받은 관우는 송대 이후에

공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위로 승격된다

거기에 제왕을 뜻하는 '제'까지 붙였다

'군'은 관우가 군주가 되었다는 뜻이다

관우를 향한 사람들의 숭배와 존경의 마음을

응축한 것이 '관성제군'이란 칭호이다

 

훗날 중국 민간에서 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사당을 지었는데 삼국 인물 중에 관우의 사당이 가장 많아졌다

현재 유명한 명승고적 중에도 관우와 관련된 사당이 매우 많다

가장 유명한 건 뤄양의 관제묘인 '관림'과

푸젠 취안저우의 관제묘가 있다

이러한 사당들이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관우을 전쟁의 신처럼 만든 것이다

전장에서 싸울 때 무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관우를 재물신, 명운의 신으로

받들기도 한다

 

<삼국지> 관우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관우는 하동군 해현 사람이다

관우는 젊은 시절에 고향에서 어떤 문제를 겪는다

문제를 피할 심산으로 동쪽을 향해 태항산을 넘었고

결국 동쪽에 있는 유주 일대에 도착하게 됐다

유주 탁현에서 유비를 만나고 유비와 고향이 같은

장비도 만나게 된다

 

&quot;alt&quot;:&quot;유비와 장비 관우의 동침&quot;

 

역사서에는 세 사람이 한 침대에 동침하며

형제처럼 아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이 훗날 <삼국지연의>에서

도원결의 이야기가 되었다

※ 도원결의: 도원에서 세 호걸이 의형제를 맺다

함께 만난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도원에서 

향을 피워 의식을 치른 뒤에 형제가 되었다고 나온다

이러한 묘사는 <삼국지> 역사서에는 없다

 

관우가 유비를 따라 대업을 시작한 때는

유비의 조건이 가장 안 좋았다

유비의 대업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는데

그 기준이 되는 게 적벽대전이다

(손권과 유비가 조조에 대승하고 중국을 삼분하였다)

관우는 유비가 대업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다

 

첫 번째는 안량을 죽인 것이다

그 당시 유비는 서주를 지키고 있었다

유비(패현)와 관우(하비)가 각각 한 곳씩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관우는 조조의 공격을 받는다

포위된 관우는 조조에게 투항했다

조조의 추격에 쫓기던 유비는 북쪽으로 도망쳐서

원소에게 의탁한다

그때 원소는 군웅할거 시대 연합군의 맹주였다

당시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였다

유비를 얻은 원소는 황하를 건너 황하 남쪽에 있는

조조를 공격하려고 했다

관도의 동북쪽에 군사 거점이 있었는데 백마이다

백마는 조조의 본진이자 관도를 엄호하기에 

유리한 곳이었다

만약 백마를 잃으면 관도 본진이 매우 위험해진다

 

원소 대군은 황하를 건너 백마를 공격했다

(백마전투 서기 200년)

백마를 공격한 군대의 통솔자는 원소의 

하북 대군에서 가장 용맹하고 날쌘 장수인 안량이었다

조조에게는 막 붙잡힌 관우가 있었다

안량이 백마를 맹렬히 공격할 때 조조의 군대가 도착한다

"관우는 안량을 상대하거라!"

보통 장수들은 안량을 상대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관우는 두려워하지 않고 안량과 싸우러 나간다

 

<삼국지> 관우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quot;alt&quot;:&quot;삼국지 관우전 중&quot;

 

관우가 말을 채찍질해 안량의 휘개가 있는 곳까지

쏜살같이 달려왔고 이에 안량은 손쓸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 휘개: 대장군의 위치를 나타내는 양상

관우는 수많은 병사 사이에서 안량을 찔렀다

관우가 안량을 죽이고 나자 백마를 공격한

원소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진다

 

 

주목할 만한 점  

 

1. 말을 타고 달려간 관우가 수만의 병사들이 

둘러싼 안량을 찔렀다

관우의 무기는 뭐였을까?

<삼국지연의>에서 관우가 안량을 참살할 때 쓴

무기는 청룡언월대도이다

무게가 약 20kg인 큰 검으로 안량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역사서에서는 '찔렀다'고 했다

찔러서 상대방을 죽이려면 손에 든 무기가 짧아서는 안 된다

고고학 전문가의 연구에 따르면 가로로 베어서 죽이는

손잡이가 긴 대도는 송나라, 당나라 이후에 생긴 무기이다

또한 약 20kg의 무게를 들고 말을 탄 상태에서 적을 

벤다고 했을 때 이미 휘두른 무거운 검을 다시 

들어올리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가장 가능성 있는 건 찌르는 무기이다

 

2. <삼국지연의>에 나온 말을 얻게 된 이야기

관우가 타는 말을 적토마라고 한다

적토마는 일반적인 말보다 빨리 달리는 명마

말이 빨리 달렸기 때문에 안량이 속수무책으로

관우에게 참살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문제가 있다

적토마는 정사 <삼국지>의 실제 역사 기록에 있다

삼국시대에 적토마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여포가 생전에 타고 다니던 말이다

하지만 조조가 여포를 죽이고 나서 

누가 적토마를 가졌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조는 좋은 물건을 남 주기 아까워했다

 

동탁이 처치되었을 때 동탁 수하에 진의록이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진의록의 아내는 아주 아름다웠다

그래서 관우는 여포를 토벌하러 가기 전에

조조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포를 처단하면 진의록의 아내를 주시겠소"

그때 조조는 관우의 충성을 받으려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성을 함락하고 두씨 부인을 얻은 뒤에

"적의 아내니까 내가 먼저 만나보리다

이렇게 아리따운 여인을 어찌 관우에게 주겠나"

그렇게 조조가 두씨 부인을 첩실로 맞이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역사서에 기록된 것이다

천하의 미인도 주기 아까워하는데

명마를 주는 건 더 아까워했을 것이다

미인은 눈으로 만족하는 거지만

명마는 위기의 상황에서 목숨을 지켜준다

관우가 안량을 참살하고 나서 조조는

관우에게 아주 후한 상을 내린다

관직도 올려주고 제후로 봉해 줬다

수많은 금은보화도 하사한다

하지만 관우가 한결같이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형님인 유비이다

그래서 기회를 잡아 조조에게서 벗어났고

형님인 유비와 다시 만난다

 

 

 

 

 

 

 

 

 

 

 

 

https://home.ebs.co.kr/greatminds/index

 

EBS 1TV 월~금 23:40 ~ 24:00 (본방) / EBS 1TV 금 13:30 ~ 14:10 (본방) / EBS 1TV 토 24:25 ~ 25:55 (종합)

EBS 2TV 금 24:00 ~ 25:30 (종합)  /  EBS KIDS 월~금 24:00 ~ 24:30 (재방)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