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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지식 사이

EBS 위대한 수업 4 앤터니 비버 (제2차 세계대전의 불편한 진실) 1~4강

by 상팔자 2025.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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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위대한 수업 4 앤터니 비버 (제2차 세계대전의 불편한 진실) 1~4강

위대한 백스물 아홉 번째 강연 '제2차 세계대전의 불편한 진실' (시즌 4 아홉 번째)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 전쟁 역사가

영국 왕립문학협회 펠로우 선정(1999)

프리츠커 문학상 군사 저술 부분 수상(2014)

영국 왕립역사협회 펠로우 선정(2017)

 



 

 

 

(2024. 11. 29. 방송)

 

1강  독일과 일본의 불완전한 동맹

 

 

 

2차 세계대전은 아주 독특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전쟁의 개념을 정의한 사건으로 남았다

2차 세계대전의 전투는 북대서양에서 남태평양까지

노르웨이와 핀란드 설원에서 리비아 사막까지

정글 전투가 벌어진 버마와 태평양 연안의 섬에서

인종청소 부대가 활동한 동부 전선 국경지대는 물론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징집된 병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alt":"1942년 세력도"

 

한 지역에서 싸우는 이들에게 세계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마치 다른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중일전쟁의 잔혹함은

서양의 약탈자가 원주민을 탄압하던 암흑기를 떠올리게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지도자의 성격이 사건을 전개했다

그 어떤 전쟁보다 극심한 분투가 전체주의 시대의

주요 인물에 의해 일어났고 이는 소수의 특출난 개인이

역사를 주도한다는 '영웅 사관'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매우 역설적이다

거대한 전쟁 규모는 역사상 처음 세계를 하나로 모았고

아프리카, 중동, 남아시아, 동아시아에서 식민주의의

종말을 가속했다

 

하지만 2차대전의 이런 국제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은 각자의 서사를 만드는 데만 매달렸다

2차대전의 개전이조차 서로 합의하지 못했다

참전국마다 전쟁에 대한 역사적인 해석이 다른데

이는 전쟁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에게 2차대전은 1941년 12월에 시작됐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며칠 후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말이다

 

푸틴은 1941년 6월에 2차대전이 시작됐다고 한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때다

푸틴은 1939년 9월, 스탈린이 독일-소련 협정 비밀조항에 따라

히틀러와 함께 폴란드를 침략한 사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럽인은 2차대전이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은 1937년 중일전쟁과 함께 시작됐다고 생각하며

혹은 그보다 전인 만주 점령 때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스페인 좌파는 1936년에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프랑코 장군이 스페인 공화국을 전복하려 

민주주의 봉기를 일으켰을 때다

 

어떤 사람들은 20세기의 장기 전쟁이

1914년부터 1945년까지 지속됐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 기간을 소련이 붕괴한 1991년까지

확장해 이를 전통적인 국가 간 전쟁이 아닌

국제적인 내전으로 보기도 한다

 

"alt":"20세기 장기 전쟁"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 갈등을 더욱 확장해서

2차 세계대전을 '20세기 장기 전쟁'이라고 부른다

독일 역사학자들은 1차대전을 최초로

'원초적 대재앙'이라고 정의했는데 맞는 말이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의 잔혹함, 파괴력, 기근이야말로

20세기 전반의 이념 전쟁이라는 양상을 만든 주범이다

이 전례 없는 공포는 백군 대 적군, 공산주의자 대 파시스트라는

극단적 대립을 낳았고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야기했다

 

우리는 2차대전에 다양한 갈등이 얽혀 있다는 점을 잊곤 한다

2차 세계대전엔 강대국 간의 경쟁뿐 아니라

4개 제국의 붕괴 후 벌어진 격렬한 민족 분쟁 

베르사유 회의에서의 국경 재설정, 파시즘과 공산주의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된 국제적 내전이 얽혀있다

 

2차대전을 단순하게 독재를 이긴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는

관점은 살펴볼 가치도 없다

전체주의 국가인 소련이 승전 세력의 주축인 것만 봐도 그렇다

2차대전은 이렇게 방대하고 다양한 갈등으로 분열돼 있다

그래서 주요 사건의 양상을 이해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를 정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그 시작점으로 보지만 그보다 1개월 전인

1939년 8월이라고 생각한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이 몽골 할힌골강에서

소련군과 충돌한 시점이다

※ 할힌골 전투: (1939년 5월 11일~9월 16일)

일본 관동군과 소련-몽골 연합군이 할힌골강 유역에서

벌인 전투로 일본이 크게 패했다

 

이후의 거대한 전투들과 비교하면 할힌골 전투는

작은 전투였다

하지만 전쟁의 전체적인 흐름에 영향을 미친 전투

소련의 주코프 장군(소련 육군 장성)은 첫 전투에서

일본을 상대로 크게 승리했다

그로 인해 일본 지휘관들은 시베리아 북부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대진 일본은 해군을 남쪽으로 보내 영국, 네덜란드의

식민지 그리고 미국의 태평양 기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래서 1941년 겨울, 일본은 독일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전 일본에게

소련 극동지역을 공격해 스탈린의 시베리아

군대의 발을 묶어달라고 요청했다

 

히틀러가 1937년 중일전쟁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건

참 의아한 일이다

중일전쟁은 히틀러의 소련 침공 4년 전에 일어난 전쟁이다

독일 장교들이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 조언을 하고 있어서

몰랐다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중국은 전문적으로 잘 무장된 군대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방어가 최선이라는 걸 깨달았다

방어군이 넓은 영토를 가지고 후퇴할 수 있다면

현대적으로 잘 훈련된 침략군도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진술적이고 지속적인 후퇴는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후방 지역의 통제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잔혹함에 대한 충격과 공포는 꼭 상대를

복종시키지만은 않는다

일본과 나치가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절박해진 상대가 오히려 저항할 수도 있다

※ 동부전선: (1941년 6월 22일~1945년 5월 9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추축국이 소련을 상대로

동유럽 지대에서 벌인 전쟁

 

1941년 6월 히틀러의 잔혹한 침공 이후 소련 국민들은

진심 어린 분노와 투지를 보였다

혹독한 훈련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특히 주코프 장군의 무자비함은 스탈린을 능가했다

 

 

 

 

 

(2024. 12. 02. 방송)

 

2강  판도를 바꾼 세 번의 전환점

 

 

 

제2차 세계대전을 논할 때 피해 규모를 나타내는

어머어마한 수치는 위험할 만큼 무감각하게 느껴진다

이는 위대한 러시아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이 

민간인 피해에 대해 쓰면서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로스만은 생존자들이 무덤에 묻힌 수많은 유령들을

이름 없는 집단이 아닌 개별적 인물로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비인간화가 바로 대량 학살의 가해자들이

의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인권과 생명 존중이 자리 잡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6,000~7,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역사적 대재앙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2차대전 희생자의 엄청난 규모를 곱씹을 때마다

그 민족적, 국가적 비극의 통계를 온전히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늘 실패한다

 

폴란드는 인구 5분의 1에 해당하는 600만 명 정도를 잃었다

중국은 2,000만 명 이상을 잃었는데 일부 추정치는 이보다 훨신 높다

소련의 총사망자 수는 2,400~2,700만으로 추정된다

1954년, 스탈린은 사망자가 2,000만이 넘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를 숨기려고 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국제 관계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데이비드 레이놀즈_역사학자)

"스탈린은 사망자 수를 750만 명으로 발표했다

그게 자신을 살인마가 아닌 영웅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 피해 수치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않는 숫자였다

스탈린이 병사들의 생명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은

1942년 가을에 있었던 화성 작전이 잘 보여준다

※ 화성 작전: (1942년 11월 25일~12월 20일)

모스크바 근방에서 발생한 나치 독일과 소련의 전투 중 하나

소련이 자국 병사 약 34만 명을 의도적으로 희생시키며 대패했다

 

화성 작전은 전쟁 역사상 가장 냉혹한 작전으로 평가된다

독일에 따르면, 화성 작전을 포함한 동부 전선의

독일군 사망자는 400만 명이 넘고 이는 2차대전

독일군 사망자 530만 명의 약 80%에 해당한다

러시아는 이를 근거로 독일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게

서부 연합군이 아닌 붉은 군대라는 걸 정당화하고 있다

하지만 푸틴의 이런 주장은 동부 전선에서 소련의 생존과

승리에 기여한 미국과 영국의 역할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푸틴은 미국과 영국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연시켰다는

소련의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그로 인해 영미 군대가

피해를 더는 대신 붉은 군대가 희생했다고 말한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

1944년 여름 전에 상륙작전을 시도했다면 재앙을 초래했을 것이다

심지어 스탈린은 흐루쇼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지원 없이는 승리할 수 없었을 걸세"

수많은 차량, 항공기, 철강과 함께 보급된 식량으로

소련은 극심한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42~1943년엔 특히 그랬다

 

대부분의 러시아 역사학자는 인정하지 않지만

논란이 된 연합군의 독일 공습도 소련에게 큰 도움을 줬다

※ 연합군의 드레스덴 공습: (1945년 2월 13일~15일)

약 2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누군가는 도덕적 관점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폭격을 비판하지만 이 공습은 확실히

독일 공군의 전투기와 대공포를 방어에 투입하게 만들었고

소련이 동부 전선의 공중전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기여했다

공습을 방어한 88mm 대공포가 독일의 가장 강력한

대전차포였기에 소련은 지상전에서도 전세를 역전할 수 있었다

독일이 동부 전선 공중전에서 우위를 상실하면서

붉은 군대의 후방 지역을 공중 정찰할 수 없게 됐다

이로 인해 소련군은 독일군 기만 작전인 

화성 작전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소련의 최대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도

은폐할 수 있었다

1944년 여름, 독일 국방군의 중부 집단군을

무너뜨린 작전이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역사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게

하나 더 있다

미국은 무기 대여법을 통해 소련에 군용 차량

50만 대를 제공했다

이로 인해  붉은 군대의 기동성이 크게 향상돼

1944년에 특히 엄청난 진전을 이뤄냈다

그 차량이 없었다면 소련군은 미국보다 먼저

베를린에 도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푸틴의 주장과 달리, 소련은 결코 혼자서

히틀러를 무너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라고 믿는다

 

 

⊙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1. 됭케르크 철수 작전 (1940년 5월)

퇴각 중이던 영국 군대가 됭케르크에서 포위됐을 때

윈스턴 처칠의 내각에서 영향력 있던 인사들 중

특히 외무장관이었던 핼리팩스 백작은 영국이

이탈리아 정부를 통해서 히틀러가 제시할 평화 조건을

알아보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처칠은 이 방법의 위험성을 인식했다

 

만약 영국 정부가 협상을 고려한다는 소식이 퍼지면

국가의 저항 정신이 무너지게 될 게 뻔했다

처칠은 그 시점이 바로 히틀러가 승리할 유일한

기회라고 예측했다

처칠은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를 결집해 전투를

이어 나가기로 한다

만약 영국이 전방 기지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유럽 해방을 위한 침공을 준비하고 실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히틀러의 선전포고 (1941년 12월)

어떤 사람들은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결정한 게 전환점이었다고 말한다

이때가 독일의 국방군이 파멸에 이른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1941년 12월을 전쟁의 지정학적 전환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독일 국방군이 모스크바 진격에 실패했고 무엇보다도

히틀러가 미국에 전쟁을 선포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추축국이 승전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3.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 (1943년 2월)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환점은 1943년 초였다

독일은 북아프리카에서 패배했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소련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는 전쟁이 나치 독일의 수도에서 끝날 거라는 걸 명확히 보여줬다

파울루스 장군이 이끌던 독일 제6군이 동상 걸린 발로

스탈린그라드를 떠나자 붉은 군대의 대령은 폐허가 된

도시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베를린이 바로 저런 모습이 될 것이다"

이 사건은 명백하게 2차대전의 심리적 전환점이 됐다

 

광신적인 나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2차대전이 독일과

그 동맹국의 완전한 붕괴로 끝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일본의 장군은 파울루스 장군이 자살 대신 항복했다는 말에

충격받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생생한 장면들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았다

이 전투는 민간인이 살던 폐허가 된 도심에서 벌어졌다

불에 탄 전차, 포탄 껍데기, 신호선, 수류탄 상자 같은 전쟁의

잔해가 가정집, 철제 침대, 램프 같은 가정용품 잔해와

뒤섞여 있었다

 

바실리 그로스만은 이렇게 묘사했다

"전투는 반쯤 허물어져 무너진 벽돌로 뒤덮인

아파트의 방과 복도에서 벌어졌다

어쩌면 그곳엔 여전히 시든 꽃이 담긴 꽃병이 있고

탁자 위엔 어린 소년의 숙제가 펼쳐져 있을 것이다"

폐허가 된 높은 건물에 있는 관측소에선 관측병이

주방 의자에 앉아 벽에 난 포탄 구멍을 통해 표적을

살폈을 것이다

독일 보병은 주택가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아주 싫어했다

근접전은 군사적 경계와 차원을 무너뜨려 심리적인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9월의 전투가 끝을 향하고 있을 때 소련과 독일은 차리차강

하구에 있는 대형 벽돌 창고를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이 창고는 층이 강 쪽으로 네 개, 육지 쪽으로는 세 개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건물이 마치 층층이 쌓인 게 케이크 같다고 했다

독일군은 맨 위층에 있고 그 아래는 소련군이

또 그 밑에는 독일군이 더 있었다

적군을 못 알아보는 일도 흔했다

부서진 벽돌과 석제의 회갈색 먼지가 군복을 뒤덮어

구분이 어려웠다

독일 장군들은 폐허 속에서 자신들이 마주할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이 자랑하던 전격전의 이점을

상실케 했고 전투 방식을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비록 독일 군사 이론가들은 참호전을 '전쟁 기술의 일탈'로

여겼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독일 제5군은 소련의 전술에 대응하기 위해

1918년 1월에 도입된 돌격대를 부활시켰다

기관총, 경박격포,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10명의

돌격대가 벙커, 지하실, 하수도를 제거하고 다녔다

이렇게 폐허 속의 근접전을 독일 병사들은

'쥐들의 전쟁'이라 불렀다

 

전투는 잔혹할 정도로 치열해 독일 장교들을 경악하게 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통제를 잃어가는 걸 느꼈다

슈트레커 장군(나치 독일의 장군)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적이 보이지 않아. 지하실, 무너진 벽, 숨겨진 벙커,

공장 폐허에 매복한 적에 공격받고 있어"

독일 지휘관들은 러시아의 뛰어난 위장술은 인정했지만

스탈린그라드를 무차별 폭격해 소련 수비대에게 이상적인

조건을 만들어준 게 독일 공군의 무차별 폭격이라는 건

인정하지 않았다

한 독일 소위는 집에 이런 편지를 보냈다

"불탄 황무지와 잔해만 남아서 이곳을 통과할 수가 없어'"

 

소련의 추이코프 장군은 방파제로 독일군의

대규모 공격을 분산시킬 계획을 짰다

하지만 실상은 대규모 전투보다 치열한 소규모의

교전이 계속됐다

추이코프 장군의 한 부하 장교는 이 전투에 참여한

소련군 돌격대가 시가전 작전을 위해 훈련받은

6~8명의 병사로 구성됐다고 기록했다

그들은 적을 조용히 제압하기 위해 칼과 날카롭게 간

삽으로 무장하고 기관단총과 수류탄도 챙겼다

하수도로 파견된 돌격대는 화염방사기와 독일군 진지에

설치할 폭약으로 무장했다

독일의 예비 병력이 부족한 걸 안 이후 소련은

더 일반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추이코프는 야간 공격에 주력했는데 독일 공군이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다는 실용적인 이유뿐 아니라

독일군이 어둠 속에서 더 큰 두려움을 느껴 금세

지칠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독일 병사들은 특히 284 소총 사단에서 온

시베리아인들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어떤 사냥감도 놓치지 않는 천부적인 사냥꾼들이었다

 

죽은 사람들에게만 집중하다 보면 2차대전 생존자들의

바뀐 삶과 그들의 흔적은 간과하게 된다

당시 군인들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이 싸운 환경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어떻게 견뎠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다

그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조차 과거를 회상하며 놀란다

붉은 군대 장교 이반 튤레네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참호 속에서 눈 오는날 지붕도 없이 신발과 옷도 한번

벗지 못하고 물과 불과 식량도 없이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걸 어떻게 견뎌낸 걸까요?"

스탈린그라드의 붉은 군대 저격수들은 굶주린 고아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빵 몇 조각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독일 보병의

물통을 채워준 아이들이었다

 

2차 세계대전 연구 중엔 다양한 군대의 전투력에 대한 게 많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와 독재 국가의 군대를 비교한 연구가 많다

하지만 두 진영 군대의 유사성은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엘리트 군과 다르게 일반 병사들의 전투력은 유사했다

 

전투 수행에 대한 일부 과장된 이론과 상반되게

증거는 적극적으로 참여한 병사가 극히 일부라 말하고 있다

1943년 영국 소령 라이오넬 위그럼이 이탈리아에서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약 30명으로 구성된 대부분의 소대에서

실제로 싸운 병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또 다른 소수는 기회만 생기면 도망치려 했다

이 둘의 중간에 있는 대부분의 병사는 상황이 잘 풀리면

싸우고 상황이 나빠지면 탈영하려 했다

 

이 연구 결과를 본 몽고메리 장군은 충격을 받아 사실을 은폐했다

미국의 전투 역사가 SLA 마셜 준장은 전쟁 직후

이 주제를 훨씬 더 깊이 연구했다

그의 연구에서 도출된 전반적인 결론은 징집된 군대에서는

소수의 병사만 적을 향해 발포한다는 거였다

붉은 군대도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 기록보관소에서 발견한 바에 따르면 전쟁 중

소련의 장교들은 적과의 교전 직후 무기를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깨끗한 총신을 갖고 있는 모든 병사를 탈영병으로 간주해

즉결해야 한다고 말이다

 

1941년에서 1945년 사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일부 붉은 군대

병사들은 12,000km가 넘는 거리를 행군하며 싸웠다

붉은 군대의 병사들은 적군인 나치와 자국의 처형

이 두 가지를 두려워하며 극심한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

소련의 병사와 민간인들은 두 전체주의 정권 사이에서

짓눌렸다

 

 

 

 

 

(2024. 12. 03. 방송)

 

3강  일본 제국의 야심과 몰락

 

 

 

제2차 세계대전은 갈등도 다양하고 복잡해서

현재와 비교할 때 신중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아직도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

군사적 사건은 물론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다

 

우리는 일본군이 극동 지역에서 서방의 포로를 끔찍하게

대한 건 기억하지만 현지 주민들이 훨씬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했다는 사실은 잊고 있다

※ 버마 철도: 일본이 버마를 점령하기 만든 철도

연합군 전쟁 포로와 강제 징용된 민간인의 피와 땀으로 건설돼

일명 '죽음의 철도'라 불린다

 

이른바 '버마 철도' 건설 현장에서 연합군 포로

사망자는 3분의 1 정도였지만 현지 강제 징용 노동자는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극동지역에서 일본이 진주만과 말레이시아를 공격하기 전

영국인들은 식민지배자의 자만심과 인종주의적 오만함에

취해 있었다

 

영국은 일본군을 심하게 과소평가했다

"모든 일본 병사가 심각한 근시이며 서방의 군대보다 열등해"

하지만 일본군은 아주 강인하고 기동성이 뛰어나며

자급자족도 가능했다

일본군에겐 교량 장비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두꺼운 대나무를 잘라 두 명씩 짝지어 강에 들어갔다

대나무를 서로의 어깨에 평행하게 걸쳐 전우들이

밟고 건너게 했다

일본 병사들은 군국주의 사회에서 자랐다

그들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총알을 막는

'천인침' 손수건을 만들었다

※ 천인침 손수건

: 천 명의 여성이 한 땀씩 수를 놓아 참전병에게 주는 부적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군국주의적 가치를 존중하며

군에 입대하는 징집병을 단체로 배웅하기도 했다

병사들은 가족과 공동체를 망신시키는 걸 두려워했다

일본의 여러 역사학자에 따르면 병사들은 이 두려움을

천황을 위해 죽는 영광보다 더 강력한 동기로 삼았다

 

일본군의 기초 훈련은 각자의 개성을 파괴했다

신병들은 상관의 끊임없는 모욕과 폭력으로 강해졌다

'억압의 연쇄 효과'라는 전략으로 패배한 적과 민간인에게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게 만들었다

※ 난징대학살

: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대규모 학살

 

1937년 12월 난징대학살에서 일본인 장교들은 중국인

포로를 줄지어 무릎 꿇게 한 뒤 사무라이 검으로 한 명씩

참수하는 연습을 했다

병사들은 나무에 묶인 중국인 포로 수천 명을 상대로

총검 연습을 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이를 거부한 병사들은 장교들에게 심하게 맞았다

 

병사들을 비인간화하는 일본 제국군의 전략은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더 강화됐다

강제로 군에 징집된 나카무라 하사의 일기에는

신병들에게 중국 민간인을 고문해 죽이는 장면을

지켜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병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나카무라는 이렇게 썼다

"처음엔 모든 신병이 그렇게 반응한다.

하지만 곧 그들도 똑같이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인종적 우월감에 젖어

일본이 동아시아를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모순에는 무감각했다

일본이 동아시아를 서구의 폭정으로부터 해방한다는 모순 말이다

일본군이 점령지 주민과 패배한 적을 다루는 방식은

근대에 이런 잔혹함이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서구인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일본 장교들이 말하는 사무라이의 명예는 패배자에게 

관대한 대우를 베푸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달랐다

일본은 서방 식민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한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자신들이 훨씬 더 가혹하게 억압했고 이는

그들이 점령한 모든 나라에 기근과 경제 붕괴를 가져왔다

 

용감하게도 난징에 안전 구역을 만든 독일 전자기기 회사의

지사장 욘 라베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일본인들의 행동에 굉장한 혼란을 느낀다

한편으로 그들은 유럽 열강과 동등한 수준의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그들의 잔혹성, 야만성, 동물성은

중세 몽골의 칭기즈 칸 군대와 다를 게 없다"

 

1930년대의 일본은 고대 문화와 벼락출세의 위험한 결합체였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 장교들은 식인 행위를

묵인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일부만 그런 게 아니다

유사한 양상이 중국에 고립된 일본군 부대와 미 해군에 의해

보급이 차단된 일본의 태평양 주둔지에서도 발견됐다

이후 미군과 호주 전쟁 범죄 조사부가 수집한 보고서에는 

이렇게 써 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광범위한 식인 행위는

극한 상황에서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이 저지른 우연한

사건 이상의 것이었다

증언에 의하면 이들의 식인 행위는 체계적이고 

조직된 군사 전략이었다"

 

일본군은 현지 주민과 연합군 전쟁 포로들

특히 영국령 인도군에서 충성한 이들을 인간 가축으로

살려뒀다가 한 명씩 차례로 도살했다

연합군은 이 사실이 전쟁 포로의 유가족에게 끼칠

충격을 우려해 이를 완전히 은폐하기로 했다

1946년 도쿄 전범 재판에서도 식인 행위에 대한

안건은 다뤄지지 않았다

 

1945년 5월 9일 독일의 항복 소식이

오키나와에 있던 미 해병 제1사단 소총부대에

전해졌을 때 그들은 '그래서 뭐?'라고 반응했다

그들은 지쳤고, 몸이 더러웠으며, 사방이 악취로 가득했다

그들에게 유럽에서의 전쟁은 다른 행성에서

벌어진 전쟁처럼 느껴졌다

오키나와에서의 잔혹한 전투 이후 남은 거라곤

더 끔찍한 거래뿐이었다

일본 본토의 혼슈와 홋카이도 상륙작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의 군인과 민간인은 죽음을 각오한 태세에

돌입해 있었다

미 해병대원들 조차도 핵폭탄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이오지마의 구리바야시 중장과 오키나와의

우시지마 대장 같은 지략가들은 미군의 상륙을

막지 않았다

또 부하들에게 절망적 상황에서 돌격 전술로 목숨을

낭비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들의 진지는 콘크리트를 덧대 견고하고

철문까지 달린 터널 망이었는데 거기엔 화약 연기를

제거하기 위한 환풍기도 있었다

야포와 기관총 진지를 잘 보호할 수 있는 곳이어서

일본은 아주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셈이었다

 

1945년 3월 25일, 이오지마 전투가 끝났을 때

미 해병 6,821명이 사망하거나 치명상을 입었으며

19,217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본군은 부상당한 54명을 제외하고

구리바야시 대장의 부대원 21,000명이 모두 전사했다

오키나와에서는 미국의 강인한 해병대원들조차

신경 쇠약에 시달렸다

일본군의 정확한 박격포와 대포 포격 때문이었다

모두가 총성과 폭발음으로 머리가 터질 듯한

두통을 겪었으며 밤에는 일본군이 방어선을 뚫으려고

쏘아대는 조명과 신호탄으로 창백한 초록빛이

악몽 같은 전장을 비췄다

 

일본군 병사들도 전투로 인한 피로에 시달리긴 마찬가지였다

공포로 인해 다리가 잘려 나가는 듯한 마비 증상을 겪었으며

'사무라이 떨림'이라고 부르는 통제할 수 없는 떨림도 경험했다

※ 케츠고 작정(결호 작전)

: 미국의 핵 공격으로 취소된 일본의 본토 방어 작전

추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은 '게츠고 작전'을 통해

자국의 병사뿐 아니라 모든 민간인을 자살 공격에 동원해

본토를 방어할 계획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어두운 역설 중 하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끔찍한 핵폭탄이

일본인 200만에서 800만 정도를 구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산이다

핵폭탄인 죽인 사람보다 훨씬 많은 수다

 

※ 포츠담 선언

: 미국, 영국, 중국이 일본에 항복을 권고하고 2차대전 이후

일본의 처리 방침을 선언

 

1945년 7월 26일, 서방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으로

일본의 항복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3일 후 거절됐고 일본군을 도청한 미국은

일본 제국의 육군 지휘관들이 항복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1945년 8월 6일 첫 번째 핵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됐다

하지만 도쿄의 전쟁 지지파들

특히 아나미 징군과 최고위급 군 지도자들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 항복할 수 없다!!"

 

일본군 최후의 결전인 게츠고 작전은 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하게 유도하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일본 지휘관들이 민간인 2,800만 명을

자살 폭탄과 대나무창으로 무장시켜 반격하게 할 

계획이었다

일본 지휘관들은 연합군의 시기가 약하니

큰 피해를 보면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

오니시 제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본인 2천만 명을 특별 공격으로 희생시킨다면

승리는 우리 것이다"

정치인들은 평화를 원했지만 육군과 해군을

통제할 수 없었다

 

1945년 8월 9일 두 번째 핵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한 소련은 중국 북부, 몽골, 만주에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그날 밤 일본 황궁에서 회의가 소집됐다

일부 역사가는 소련군의 행동으로 일본이 항복을

결심했을 거라고 하지만 최고 지휘관들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총참모장 우메즈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소련의 참전은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본토에서의

전투 계획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많은 이가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항복하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히로히토 천황은 핵폭탄의 엄청난

파괴력으로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음을 명확히 밝혔다

천황의 이런 결정에도 장군과 제독들은 전쟁을

계속하길 원했고 중견 장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때문에 천황은 비밀리에 항복 방송을 녹음해야 했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장교들을 피해 황궁에 몸을 숨겨야 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미국이 세 번째 핵폭탄을 

투하하기 사흘 전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이 전쟁을 끝냈다

 

버마에 주둔했던 영국군 총사령관 윌리엄 슬림 장군은

일본 지휘관들은 용감하지만 도덕적으로 비겁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이 전쟁에 패배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죽도록 

내버려두려 했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 상륙작전 성공을 기다리며 전쟁이 한 해

더 연장됐다면 더 많은 일본인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일본의 태평양, 동남아시아 점령은 대규모

기근을 초래했다

베트남에서만 이미 200만 명이 사망했고

매달 민간인 약 30만 명이 전역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미국이 극동지역에서 핵폭탄으로 잔혹하게 전쟁을

끝내기로 한 건 사실 그 지역 사람들보다는 

연합군 전쟁 포로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핵폭탄 사망자보다 더 많은 수의

일본인을 구한 셈이 됐다

 

일본 제국군은 본토 침략에 끝까지 대항할 결심을 했고

소련의 몽골, 만주 공격에 크게 영향받지 않았음은

우메즈 장군의 발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군 지도자들의 이런 기이한 집착은

북중국과 만주에서 만날 소련군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자국 내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일본 내 공산주의 혁명 가능성에 대한 뚜렷한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2024. 12. 04. 방송)

 

4강  전쟁이 남긴 것들

 

 

 

연합국 지도자들은 고전적 실수인 민주주의적

확증 편향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적의 입장에서 상황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어 1944년 7월 20일 독일 장교들이

동프로이센에서 폭탄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을 때

연합국 지도자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믿었다

어떤 군대든 자국의 지도자나 총사령관을 암살하려 한다면

그 군대는 곧 붕괴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히틀러가

암살로부터 살아남자 나치의 친위대와 게슈타포가

전쟁을 끝까지 끌고 갔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944년 봄이 되자 히틀러는

전쟁을 비합리적으로 지휘했고 영국은 히틀러를

제거하는 게 실수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히틀러가 전쟁을 지휘하는 게 연합국이 더 빨리

승리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특수작전국의 히틀러 암살 작전은 취소됐다

 

2차 세계대전의 잔혹함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건

전투원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은 유엔 위원회에서 열심히 싸웠다

자신들이 저지른 귀족, 부르주아, 강제 수용자 대량 학살이

국제적인 제노사이드로 정의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반체제 인사인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스탈린이 더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는 모르지만

먼저 무너뜨려야 할 대상은 히틀러라고 말했다

만약 나치가 소련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면

의도적인 기아로 소련의 인구를 줄이겠다는 나치의

계획은 홀로코스트를 뛰어넘는 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은 국가적 충성심보다

이념적 갈등이 크게 작용한 전쟁이다

이 양상은 전쟁이 끝난 후 더욱 선명해졌다

1945년 8월, 소련은 이탈리아 병사를 석방하기 시작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날 무렵 동부 전산에서

포로로 잡힌 이들이었다

병사들은 귀국이 허용됐지만 장교들은 아니었다

당시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툴리아티가

다음 해 선거가 끝날 때까지 장교들의 귀환을

늦춰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기차역에 모여

귀환하는 병사들을 환영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타고 온 열차에는 '공산주의 타도'라는

문구가 써 있었다

병사들이 소련에서 받은 처우에 불만을 갖고 쓴 것이었다

역에선 싸움이 벌어졌다

 

공산주의 언론은 소련 수용소 환경을 비판하거나

소련이 노동자의 낙원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을

파시스트로 몰았다

한 이탈리아 육군 장교가 남긴 기록이다

"우리는 밀라노로 가는 도중 모든 역에서 멈췄다

각 역은 자신의 아들, 아버지, 남편의 사진을 들고

그들의 이름을 외치며 혹시 본 적 있는지 정보를

알고 있는지 묻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 가슴 아픈 장면은 매 역마다 반복됐다"

 

프랑스에서는 나치에 한복해서 독일군복을 입은

소련 병사들이 소련 장교에게 넘겨졌다

장교들은 인근 숲에서 잠재적 반역의 우두머리들을

처형한 후 나머지 병사들은 소련으로 송환해 

추가 심사를 거친 뒤 강제 노역에 처했다

영국군은 나치 친위대 소속의 코사크 병사들도 소련에 넘겼다

영국 정부는 그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알고 있었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시민들을 스탈린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폴란드와 동독에서 소련군에 의해 풀려난

영국 포로가 소련 당국에 의해 억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군대는 중국 북부와 만주에서 관동군 소속의

일본 병사 60만 명을 체포했다

모두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 보내졌고 대부분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유럽과 극동 전역에서는 예전부터 노예 노동에 동원된

실향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썼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억압을 가장 심하게 경험한 지역은

중앙 유럽의 국경지대였다

특히 1930년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 의도적으로

발생시킨 홀로도모르 기근은 약 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2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이후 국경이 사라지거나 재설정됐다

인구를 포함한 도시 전체가 강제로 이주당하기도 했다

준군사조직, 비밀경찰, 군대가 피해자들을 쫓아내거나

살해했다

1939년, 지금의 우크라이나 서쪽으로 갑자기

편입된 폴란드 사람들은 황폐한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 쫓겨나 굶주린 채 방치됐다

특히 르부프라는 도시는 전쟁 중 소련과 독일에

한 번씩 점령됐는데 전쟁 후에는 폴란드의 루부프가

우크라이나의 르비우가 됐고 전쟁 전부터 그곳에 살던

폴란드인과 유태인들은 죽거나 추방됐다

 

"alt":"전쟁 전후 르부프"

 

※ 알타 회담 (1945년 2월 4일 ~ 11일)

: 2차 세계대전 종반에 미국, 영국, 소련이 모여

독일에 대한 패전 처리 문제를 논의한 회담

 

스탈린은 얄타 회담에서 연합군을 압박해

폴란드 전체가 서쪽으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전쟁 후 폴란드는 독일 땅이었던 동프로이센,

실레시아, 포메라니아를 흡수하고 소련은 폴란드 동쪽과

동프로이센의 주도였던 칼라닌그라드를 차지했다

붉은 군대는 현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청소를 자행했다

1,300만 명이 넘는 독일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이

강제로 이주당했다

독일의 브레슬라우는 폴란드의 브로츠와프가 됐고

우크라이나 서쪽에서 이주한 폴란드인들이 살게 됐다

 

※ 포츠담 회담 (1945년 7월 17일 ~ 8월 2일)

2차대전 종결 직전 미국, 영국, 소련이 항복한 독일에 대한  

처리를 논의한 회담

 

1945년 8월 포츠담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소련의 힘을 확장하려는 스탈린의 욕망이 명확히 드러났다

그는 이탈리아가 소유했던 아프리카 식민지에 관심을 보였고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을 제거하자고 연합군에게 제안했다

처칠이 휴식 시간 중 미국 대사 해리먼과 스탈린이

나눈 대화를 들었다면 그는 자신이 걱정한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워했을 것이다

대화는 해리먼의 말로 시작됐다

"그 모든 역경 끝에 당신의 군대가 베를린에 있다는 게

아주 기쁘겠군요"

스탈린은 해리먼을 보며 말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는 파리까지 진격해는 걸요"

스탈린은 미동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944년에 열린 소련 정치국 회의에서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침공을 계획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슈테멘코 장군은 훗날 이 사실을 베리야의 아들에게 알렸다

붉은 군대의 공세는 현지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될 예정이었다

슈테멘코 장군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그 계획엔 

노르웨이 상륙작전과 덴마트 해협 장악도 포함돼 있었다

소련은 유럽이 혼란에 빠지면 미국은 유럽을 포기할 것이고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련의 노련한 400개 사단은 언제든 싸울 준비가 돼 있었고

이 모든 작전은 한 달 안에 완수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스탈린이 베리야를 통해

미국이 핵폭탄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중단됐다

스탈린은 베리야에게 이렇게 말했다

"루스벨트가 살아 있었다면 우린 계획에 성공했을 거야"

이걸 보면 스탈린은 친해지고 싶었던 루스벨트가

비밀리에 암살됐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전쟁 전부터 형성돼 있던 독일과 소련의 국경 지역은

'피의 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30~1945년, 민간인 약 1,400만 명이 이곳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중 절반 이상이 고의적인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의 홀로도모르 기근과 히틀러의 '기아 계획'에

의해서였다

※ 히틀러의 기아 계획 (1940 ~ 1941년)

: 나치 독일이 소련의 민간인을 집단 학살하기 위해 세운

식량 수탈 계획

 

나치는 기아 계획으로 소련 인구의 3천만 명을

줄이는 게 목표였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성공적이진 않았다

독일 국방군에게 현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로 학살된 유태인 540만 명 중

최소 400만 명이 폴란드, 발트 3국, 우크라이나의

'피의 땅'에 살던 사람들이다

스탈린과 히틀러 둘 다 이 지역 사람들을 경멸했으며

이곳의 학자, 성직자, 교사, 정치인, 군 장교 등

엘리트를 제거하려 최선을 다했다

이 둘은 동부 전선에서 잡은 포로 역시

굶주림과 강제 노역으로 죽게 했다

 

스탈린은 최초로 홀로코스트를 부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1945년, 그는 유대인들이 특별한 희생자로 여겨지는

것에 반대했다

소련 공산당은 죽은 자를 구분하지 말라는 슬로건을

만들어 모든 민간인 희생자를 '유대인'이 아닌

'소련 시민'으로 불렀다

1941년, 히틀러는 국경 지역 주민과 옛 소련 병사들을

보조병으로 징집하는 걸 싫어했다

히틀러에게 그들은 독일인도 아니고 열등한 인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인리히 힘러를 포함한 히틀러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광대한 땅을 정복하려면 그들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독일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히틀러 암살 시도를 하기

3년 전 소련을 무너트릴 유일한 방법은 우크라이나인, 코사크인 등

반소련 민족에서 병사 백만을 모집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비독일인 지원병들은 때론 나치 친위대보다 더 잔인하게 굴었다

전쟁 중 외세의 점령으로 고통받은 이들은 복수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니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적 있는 노르웨이 저항군

레이프 호벨센은 중세 오슬로의 유적지에서 독일군

포로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독일 공군 유니폼을 입은 새 포로들이 도착했을 때

호벨센은 그중 몇 명을 즉시 알아봤다

그들은 그리니 강제 수용소의 지휘관과 경비원들이었다

호벨센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주인이다. 그들에게 받았던 가혹한 훈련을

이제 그들에게 돌려줄 차례다. 그들이 우리에게 강제로 부르게 한

행진가를 이제 그들에게 부르게 할 차례다"

 

한 포로가 물을 달라고 애원하자 호벨센은

양동이에 물을 담아 그의 얼굴에 뿌렸다

이에 노르웨이 전우들이 환호했지만 이후 호벨센은

죄책감을 느꼈다

기독교인이자 애국자인 그가 자신을 괴롭힌 사람과

똑같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죄로부터 구원받고 싶었던 호벨센은 독일로 떠나 

자신이 학대한 강제 수용소 경비원에게 용서를 구하려 했지만

경비원이 이미 세상을 떠나서 그의 딸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의 무덤에 꽃을 올렸다

 

좋든 나쁘든, 2차 세계대전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형성했다

극동지역에서는 일본이 패배하며 과거의 원한을 

그대로 간직한 현대 중국이 부상했다

또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유럽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고

미국과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2차대전은 유럽 연합의 결성을 촉발했고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유엔을 탄생시켰다 (1945년 6월 26일_유엔 헌장 조인)

 

비록 유엔이 많은 단점과 약점을 갖고 있지만

국제적 도덕성을 논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드러난 불편한 역설 하나는

독재 국가의 군대보다 민주주의 국가의 군대가

더 많은 민간인을 죽게 했다는 사실이다

 

연합국의 장군들은 자국 내 언론과 여론의

압박을 의식해 자국 병사의 희생을 줄이고자 고성능

폭발물로 적을 멀리서 공격했다

예를 들어, 2차대전 동안 영국과 미국은 폭격으로

많은 프랑스 민간인을 죽게 했는데 그 수가 독일의

폭격으로 죽은 영국인 수만큼이나 많다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심각한 정치, 사회, 경제적 불안

속에서 사람들이 다시 2차 세계대전을 보며 경각심을

갖는 건 이해할 만하다

더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우리가 역사상 가장 큰 비극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세계적 갈등을 향해

맹목적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어찌 되었든 2차 세계대전은 그 어떤 시기보다

다양한 사료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도덕적 선택, 개인과 집단의 비극, 권력의 부패,

이념적 위선, 지휘관들의 오만, 배신, 왜곡,

믿기 힘든 잔혹함뿐 아니라 자기희생,

예상치 못한 연민까지 말이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의 교훈은 단순히 범주화하거나

일반화할 수 없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다면 바로 도덕성이다

가장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인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보여준 모범은 오늘날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우리가

충분히 본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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