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2 방송)
EBS 위대한 수업 3 (이란의 봄)
위대한 백한 번째 강연 '이란의 봄' (시즌 3 스무 번째)
시린 에바디(Shirin Ebadi)
이란 인권수호센터 초대회장(2001)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2001)
노벨평화상(2003)
민주주의는 여성의 권리라는 문을 통해 이란에 찾아올 것이다
여성에 의해서
1강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 여성의 법적 지위
1979년에 이란 혁명이 일어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세워졌다
♣ 이란 이슬람 혁명(1979년)
: 팔리비 왕조의 부정부패와 급격한 서구화 정책으로 분노한 국민들이 일으킨 혁명
: 군주제를 무너트리고 종교지도자인 호메이나를 중심으로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 건설
혁명이 일어나기 전, 여성들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
가정에서의 법적 권리도 지금보다 더 보장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이 양육과 재산 상속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갖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인해 여성들은 많은 권리를 빼앗겼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혁명의 지도자였던 호메이니와 그의 세력들은 외쳤다
이란의 여성들은 여기에 속아 호메이니를 지지했고
이슬람 공화국이 탄생하는데 표를 보탰다(이란 국민 투표_1979년)
국민의 98.2% 찬성
♣ 이란 이슬람 공화국 건국(1979년)
: 이슬람 교리에 입각한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
하지만 호메이니는 이란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한 이야기와 약속을 잊어버렸다
이때부터 히잡 의무 착용에 반대하는 이란 여성의 첫 번째 행진이 시작됐다
정부는 여성들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국제 여성의 날 여성 차별 반대 시위(1979년 3월 8일)
"우리는 남, 녀 인간 평등을 지지하는 정권을 원한다"
당시엔 정부가 완전히 수립되기 전이라 이 명령은 시행되지 않았다
조금씩 히잡에 관한 법이 형태를 잡아가며
거리에서 히잡을 의무로 착용하게 했다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상점의 물품 판매를 금지시켰다
택시가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을 태우면 영업이 정지됐다
혁명 후 첫 번째 의회가 열렸다
여성이 잃어버린 첫 번째 권리 중 하나는 판사가 될 권리였다
당시 약 1,000명의 여성 판사가 있었는데 모두 강등시켰다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혁명 위원회에 의해 제정된 법이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이 양육권과 재산 상속권은 시아버지가 갖게 됐다
엄마의 모든 법적 권리를 잃어버리게 됐다
이것이 여성 억압의 시작이었다
이 법이 의회도, 헌법도 갖춰지기 전에 제정됐다
그 시기 혁명 세력의 모든 관심은 정권 수립에 있었다
그중 최우선은 중요한 경제 같은 게 아니라 여성에 관한 거였다
혁명 위원회는 경제, 정치, 국경 지역의 안보 등
중요한 사안들에 집중하는 대신
남자 1명이 여자 4명과 결혼해 어떻게 여성들을 제약할 수 있을지
어떻게 의복을 강요할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당시 교육받고 깨어 있는 여성들은 거꾸로 가는 법과 혁명 세력에 대항했다
혁명 초기는 정부가 완전히 힘을 얻기 전이라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여성들은 거리 행진과 시위를 하며, 학술대회를 열고, 칼럼을 썼다
하지만 혁명 세력이든 비혁명 세력이든 남성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지지해 주길 기대했지만 그들은 지지해 주지 않았다
"우리가 승리한 후에 여성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그러면 평등한 권리를 얻을 거예요"
그들은 여성들을 지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침묵하기를 바랐다
1980년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략했고 8년 동안 피의 전쟁을 치렀다
♣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 이란의 석유 자원을 노린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여 벌어진 전쟁
이 전쟁으로 정부는 국가 안보라는 명분을 무기로 자유주의자들을 진압하려 했다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은 여전히 가능했다
정권은 우선 사회주의자와 좌파 수장들을 죽이고 정당을 해체했다
많은 지지자를 체포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사회는 점차 폐쇄적으로 변해 조금이라도 정권에 반대하면
감옥에 가거나 처형됐다
그제야 사람들은 여성들의 외침의 뜻을 이해하게 됐다
이란에서 여전히 금지된 것은 3월 8일을 기념하는 행사이다(국제 여성의 날)
서구의 문화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최고지도자는 분명하게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히잡은 착용해야 한다
히잡 의무 착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히잡은 이 정권의 레드라인이다, 깃발이다
그들은 이 깃발을 안 내릴 것이다
깃발을 내리면 여성들이 다른 권리도 요구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권을 지배하는 남성도, 투쟁하는 여성도 알고 있다
이 전쟁은 여성이 평등해질 때까지 계속될 거라는 것을 말이다
(2024.01.23 방송)
2강 최전선에 선 여성들
이란 여성들은 여성과 관련 없는 이슈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자의 적은 월급에 항의해 파업하면 가족의 생계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노동자 문제에도 맨 앞줄에 섰다
이란 여성들은 교육열도 매우 높다
교육을 평등과 해방의 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에는 여성 정치인도 있다
하지만 이란 여성 정치인은 남녀평등 지지자가 아니다
이 정권이 여성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데려다 놓는 자들이다
퇴행하는 다수의 법들이 이 여성들에 의해 제정된 것이다
2022년 9월 마흐사가 세상을 떠났다
경찰 조사 중 의문사(2022년 9월 16일)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란 히잡 시위
이란 국회의원은 자유롭게 선출되지 않는다
혁명위원회가 승인한 후보에 한해 국민들이 투표를 한다
국회에 여성들도 있지만 교육받은 여성들은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여성 대사도 있지만 이는 정부가 여성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표식일 뿐이다
여성들은 기대 없이 자신들만의 길을 가고 있다
국민들의 투쟁이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백만 서명 운동이다
♣ 백만 서명 운동
: 이란 여성의 법적, 사회적 차별을 알리기 위해 시린 에바디와 여성 단체가 주도한 성 평등 운동
이란 법에 의하면 여성의 목숨 가치는 남성의 절반이다
만약 남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 둘이 똑같은 피해를 입었다면
남자는 2배의 보상을 받게 된다
법정에서는 여성 증인 2명과 남성 증인 1명이 같다고 여겨진다
여대생이 50% 이상인 교육받은 여성이 넘치는 이 나라에서 말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성들은 길거리로 나왔다
여성의 권리와 관련된 시위든 노동자와 관련된 시위든
이란의 만연한 폭정 앞에 맞서 싸워 왔다
그리고 시위의 맨 앞줄에 서서 대항했다
동시에 여성은 이 정권의 적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히잡 의무 착용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의 모든 권리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히잡이 아닌, 히잡 의무 착용에 반대한다
♣ 하얀 수요일 캠페인(White Wednesdays)
: 히잡 강제 착용법에 저항하기 위해 저널리스트 마시 알리네자드가 주도한 캠페인
이란 국외에 사는 페미니스트가 수요일에는 하얀 스카프를 쓰고 나가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다수의 여성 변호사가 위험해질 것을 알면서도 법정에서 변호하고 있다
현 정권에선 이를 모르는 척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현 정권의 레드라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의복의 자유를 넘어 완전히 동등한 법적 권리이다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여성의 결혼 나이가 바뀌었다
18살에서 9살로 바뀌었다
조혼이 급증했다(특히 수입이 적은 가족에서)
여성들은 맹렬하게 저항했고
혼인 가능 연령을 9살에서 13살로 바꾸었다(1991년)
하지만 우린 18살을 원한다, 적어도 혼인 가능한 연력은 18살이어야 한다
이란 여성들은 현재 이혼을 하게 되면
자녀가 7살이 될 때까지 양육권을 가질 수 있다
이후에는 법원이 아이들에게 좋은 쪽으로 결정한다
법 개정 전에는 양육권에 대해 엄마들이 가진 권리는 훨씬 적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하나의 큰 소망이 있다
바로 완전한 법적 평등이다
민주주의 뜻도 바로 그거다
Q. 만약 이란 정부가 바뀌면 이 상황도 바뀌지 않을까?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이란의 구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성직자이자 시아파여야 한다
지금은 알리 호세인 하메네이이다(이란 제2대 최고지도자)
최고지도자는 최고 지위의 성직자들에 의해 종신직으로 선출된다
이 성직자들은 최고지도자의 영향 아래 있다
최고지도자는 모든 법을 폐기할 수 있다
이란에는 의회가 있다
하지만 법이 입법되기 위해서는 헌법수호위원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헌법수호위원회는 6명의 법학자와 6명의 성직자로 구성된다
여기서 6명의 성직자는 최고지도자에 의해 임명된다
법학자도 최고지도자가 선출한 사람이다
즉, 최고지도자는 어떤 법이든 무효화시킬 수 있다
적법성과는 상관없다
이란 정부는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란 제7-8대 대통령, 개혁파)
재임 시절에 고문 금지 조약에 가입하기로 했다
의회는 승인했지만 헌법수호위원회는
이슬람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만약 이 조약에 가입했다면 지금 법에 있는
태형, 손과 발을 자르는 벌, 돌을 던지는 벌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전통적인 형벌은 이란의 법에 이슬람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최고지도자의 권위와 존재, 이슬람에 기반한 법은 바꿀 수 없다
2022년 9월 마흐사의 죽음으로 출발한 기차의 종착역은 정권의 붕괴이다
우리는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새로운 정권을 갖게 될 것이다
(2024.01.24 방송)
3강 2022년 9월 히잡 혁명
2022년 9월, 현 정권에 의해 젊은 여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휘발유가 가득 든 드럼통에 불을 붙인 것과 같았다
마흐사의 죽음은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을 100개가 넘는
도시의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했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이 정부를 원하지 않는다
매우 평화로운 방법으로 거리에 나왔다
사람들의 유일한 무기는 꽉 쥔 주먹과 소리칠 입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총탄과 감옥으로 답했다
6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그중에 68명은 18세 미만의
어린 청소년과 아이였다
당시 최소 2만 명이 체포됐다
그중 최소 300명은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정확한 숫자와 통계는 말하기 힘들다
정부는 이번 사위는 물론 전 세계에서 일어난 히잡 시위에 대해
한 번도 정확한 수치를 발표한 적이 없었다
관련 가족들이 배포한 자료나 언론의 취재,
인권 단체의 진상 규명 조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이번시위는 희생자 수가 너무 많아서
UN 인권이사회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해
이란의 인권 침해를 조사하기로 결정했고 현재 진행 중이다
UN은 1979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집권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다수의 결의안을 통해 이란의 광범위하고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해 강하게 비판해 왔다
국제 협약을 존중해 달라고 촉구했지만
이란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언제나 이란의 인권 상황은 최악이었고
인권 전문 보도 매체도 한 곳뿐이다
안타깝게도 이번 시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과 시력을 잃었다, 산탄총을 발포했기 때문이다
산탄총은 한 번 발포하면 빠른 속도로 여러 개의 탄환이 흩어지며 발사된다
한 발은 적어도 1명, 혹은 2명의 눈을 멀게 한다
산탄총에 맞아 시각을 잃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안과 의사 협회가 그 위험성을 경고하며 항의도 했다
보통 시위에서 누군가 다치면 병원에서 진료받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병원도 안전하지 않다
병원을 감시하던 경찰이 다친 사람들을 체포했다
분명히 시위에 갔기 때문에 다쳤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란의 의사들은 저항했다
환자들을 못 데려가게 했다
경찰은 병원을 감시하고 습격하곤 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환자를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응급실에 최루가스도 살포했다
이번 시위에서 6명의 헌신적인 의사들이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다 비극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정부의 강력한 진압 때문에
시위 현장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훨씬 작아졌다
체포된 사람 중 7명은 단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됐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형태로 시위를 한다
삶의 현장 곳곳에서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이전 시위에 비해 규모는 작아졌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있다
그럼에도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밤마다 이란 국민들이 어둠 속에서 외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정권을 원하지 않는다"
그 목소리는 아주 크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민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란의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이 40%를 넘었다고 말한다
이란 통화 가치는 급격히 떨어졌다
한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노동자들이
이란으로 일하러 왔다
하지만 지금은 이란의 통화 가치가 너무 낮다
최근 뉴스를 보면 이란 노동자들이 이라크로 가고 있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히잡 시위 후 이란이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에 난민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어떤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남성들도 여성을 지지했다
여성들이 승리한다면 히잡 의무 착용이 철폐될 것이고
그럼 남성들도 승리하는 것과 같다
남성들도 이란의 민주주의가 여성인권이라는 문을 통해 들어온다는 것을 안다
젊은 여대생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 혁명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구호를 외쳤다
이란과 전 세계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혁명에 참여했다
이 혁명은 초월적이며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이란 여성들은 더 나은 삶을 살 권리가 있고 마침내 얻게 될 것이다
지금도 싸우며 법적 평등의 대가로 자유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정부가 체포한대도 계속될 것이다
히잡을 안 쓰고 나가면 체포될 것을 알면서도
최근 이란 영상을 보면 다시 거리로 나온 여성들을 볼 수 있다
어떤 대가를 치러도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혁명은 2022년에 시작됐다
처음으로 여자 고등학생들도 거리에 나왔다
그들의 부모와 함께 거리로 나와 소리쳤다
"우리는 이 정부를 원하지 않는다"
이 정권하에서 여성이 머물 자리는 없다
여성들은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2024.01.25 방송)
4강 이슬람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처럼 이슬람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노르웨이는 동성혼이 합법이다
이탈리아 교회는 동성애자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지만
노르웨이 교회는 인정하고 있다
낙태의 경우도 어떤 교회는 인정하지만 어떤 교회는 그렇지 않다
이슬람도 동일하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전 세계에 206개의 나라가 있다
이 나라들의 무슬림들의 상황은 다 같지 않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는 하나의 종교를 다르게 해석한 결과이다
현대적이고 교육받은 무슬림들은
종교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 인권과 민주주의를
따를 수 있게 하려고 한다
이 법은 바꿀 수 없다
즉, 무슬림이라면 처음 정해진 법대로 기도를 해야 한다
어떤 것을 바꾸거나 더하거나 할 수는 없다
이 법을 첫 번째 계명이라 한다
1. 이바다트(의례적 규범)
이 법은 지키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다
유일한 처벌은 신만이 할 수 있다, 그것도 죽음 이후이다
자신이 무슬림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지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문제는 샤리아의 두 번째 법이다
2. 무아마라트(법적 규범)
개인을 사회에서 규정하는 법이다
결혼, 이혼, 거래, 처벌, 벌금 등에 관한 법들이다
이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보면
도둑질한 자의 손을 잘라야 한다고 쓰여있다
이것이 법의 의미이고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도둑에 대한 처벌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그 시절 아랍에는 감옥이 없었다
이슬람 국가의 판사가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따라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실행한다면
도둑이 저지른 죄와 상황을 참고해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의 감옥형을 선고할 수 있다
전자 발찌의 착용 유무와 감옥의 종류도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이 이슬람의 샤리아이다
역사 속에서 보면 무함마드(이슬람교 창시자)가
참가한 전쟁에서 한 군인이 다른 군인의 무기를 훔쳤다
군인들은 그를 잡아 무함마드에게 데려갔다
그런데 무함마드는 도둑이 훔쳐 간 무기를
돌려받은 후 풀어주라고 말했다
몇몇은 도둑의 손을 잘라야 한다고 반대했다
무함마드는 말했다
"우리는 긴박한 전쟁 상황에 있다,
도둑질한 이 군인이 우리의 전략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데
만약 그의 손을 자르면 분명 적군이 돼서 우리 무기를 뺏을 것이다"
"이건 선의가 아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이 법을 삭제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도둑의 손을 자르거나
태형을 가하는 형벌을 바꿀 수 없을까?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무함마드는 예언자이면서 이슬람교에 따른 통치를 만든 사람이다
그가 이슬람 통치를 만들었을 때 말했다
"내 통치를 인정한다면 누구나 나를 지지해야 한다"
그 당시에는 누군가의 통치를 받아들인다고 표현할 때
그 사람과 악수한 후 볼에 키스하거나 어깨를 서로 맞대어한다
그 시절 아랍의 관습이었다
무함마드가 서 있으면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지지한다고 표현했다
무함마드는 여자들도 지지한다는 걸 보여달라고 했다
당시 관습에서 남녀의 악수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무함마드는 큰 물그릇을 가져오라고 명령했고
거기에 손을 집어 넣게 했다
지지하는 여성은 물그릇에 손을 넣었다 빼라고 했다
이슬람에도 민주주의는 존재한다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있으니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왜 일부 이슬람 국가에는 민주주의가 없을까?
의회가 있다 해도 샤, 술탄, 셰이크(이슬람 국가의 지도자) 등의
높은 사람들이 친족들 중에 직접 임명한다
그들은 조언자일 뿐, 의회라고 할 수 없다
많은 중동 국가에는 의회가 없다
민주주의는 이슬람과 관련 있는 게 아니라
힘을 가진 자들의 사상과 관련 있는 것이다
언제나 이슬람 국가의 문제는 이것이다
통치자의 생각을 이슬람이라는 이름에 숨긴다
국민을 향한 모든 탄압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1945년 이란은 국제 인권 규약의 회원이었고
UN 여성기구의 회원국이었다
2022년 히잡 시위를 탄압한 결과로
UN 여성기구에서 퇴출당했다
왜 인권 협약을 준수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면
이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무슬림이고 샤리아에 그렇게 되어있다고 말한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이슬람이 정치가 될 때이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여성은 초등학교 이후에는 교육받을 수 없고
이슬람의 이름으로 여성은 사무실에서 일하면 안 된다
최근에는 미용실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즉 우리의 문제는 이슬람이 아니다
이슬람을 옳지 못하게 해석해 이슬람을 악용하는 것이 문제이다
(2024.01.26 방송)
5강 이란 핵 개발의 진실
이란의 핵 개발이 야기한 국내 문제 및 외교 정책
이란의 핵 개발은 이슬람 혁명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핵 발전을 이용한 전기 생산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됐다
당시 이란은 왕인 '샤'가 통치하던 시대였다
마지막 왕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1975~1976년경
초기 계획인 기술적 업무들이 어느 정도 진행되던 중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잠시 계획을 중단시켰다
1980년에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고 8년간 지속됐다
♣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 이란의 석유 자원을 노린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여 벌어진 전쟁
여러 문제를 해결한 후에야 핵 개발이 재개됐다
당시 미국은 반이란 제재를 부과했다
사실 미국의 반이란 제재 역사는 1979년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는 이슬람 혁명 정부가 정권을 잡은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혁명 세력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미국 외교관들을 인들로 삼고 444일 동안 가뒀다
미국의 반이란 제재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미국 행정명령 발령(1979.11), 미국 내 이란 자산 120억 달러 동결
이란은 파키스탄의 압둘 카디르 칸의 도움을 받아 핵 기술을 얻었고
필요한 부품 일부는 북한에서 가져왔다
이란은 점점 청년들에게 관련 분야의 교육을 받게 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교육을 시켰다
덕분에 어느정도 핵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2002년 IAEA(국제원자력기구)와 미국, 유럽은
이란이 비밀리에 나탄즈에서 핵 개발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IAEA 규범 위반이었다
이란 정부는 강력한 제재를 막기 위해 1년간 모든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핵 개발을 시작했다
지하에서 비밀리에 진행됐다
이란 정부는 핵 관련해서 전 세계를 속인 것과 같다
과거에 최고지도자가 파트와를 내렸다
그러면서 이란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30년 만에 부셰르 발전소를 완공했다
건축비는 수십억 달러가 들었다
그런데 부셰르 원자력 발전소는 이란 전체 전력 중 고작 1%만을 제공할 뿐이다
하나의 단층이 이란의 남쪽을 지나고 있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도 그 파트와는 믿을 것이 못 된다
파트와는 최고지도자에 의해 매 순간 바뀔 수 있다
언제든 핵이 다시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파트와는 국제 사회를 속이기 위함이다
심지어 이란 정부는 국영 방송사를 통해 공표한 적도 있다
만약 필요하다면 우리는 핵폭탄도 만들 거라고 말이다
이 문제는 이란이 만들고 있던 장거리 미사일과 함께 문제가 됐다
이란이 강력한 제재에 직면하게 된 이유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된 후
미국은 굉장히 강력한 반이란 제재를 부과했다
이란의 핵 농축을 멈추게 하려고 했다
국제 사회는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재가 점점 심해짐에 따라 이란의 상황은 더 악화됐다
심지어 공기업 월급도 늦게 지급되기 시작했다
이란은 협상을 통해 단계별로 핵농축을 멈추고
IAEA의 사찰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란의 제재는 해제됐다
그런데 제재가 해제되고 수십억 달러의 동결 자금이
이란으로 들어왔는데도 국민들의 삶은 좋아지지 않았다
모든 돈이 정부의 비용으로 사용됐고
부패와 비효율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등장하며 미국은 일방적으로 협정에서 탈퇴했고
이란 정부는 단계별로 합의를 파기하겠다고 했다
그 대가는 미국이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이 핵합의는 이란에 매우 유리하다
시간이 지나면 원하는대로 하려고 했다
이란은 강화된 제재를 해제하고자 바이든 대통령 당선 직후,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협상은 아무 의미 없다
이란 정부는 이 협상으로 시간을 벌고 싶을 뿐이다
제재가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왜 국제 사회는 이란에 이렇게 예민할까?
1979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집권한 후
정치 슬로건은 혁명의 수출이었다
이란은 가장 먼저 레바논의 준군사조직으로 알려진
'헤즈볼라' 창당에 도움을 줬다
♣ 헤즈볼라: 레바논의 정당이자 친 이란 무장 세력
레바논 남쪽, 이스라엘 국경 지대에 주둔해 있다
헤즈볼라의 무기, 군수품, 옷과 음식 등 비용 전부를
이란이 지원했다
레바논에 주둔한 헤즈볼라의 존재로
레바논은 재앙에 빠지며 비극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헤즈볼라는 더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 오랫동안 대통령 선출을 막았다
이란은 이라크의 준군사조직 설립도 지원했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말이다
그들을 교육시켜 이라크 내부 상황에 완전히 개입했다
정치와 내부 안정을 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가 이란을 눈엣가시로 여기게 된 이유가 이것이다
그래서 이란이 핵폭탄 같은 위험한 무기를 갖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의 뿌리는 이란 정부의 외교 정책이다
이란이 인근 국가들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혁명을 수출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란도 가난해지지 않았을 테고 중동도 혼란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국민들이 이란 정부를 원하지 않는 이유이다
혁명의 기차는 출발했고 우리는 승리할 것이고
히잡 혁명은 이 정부를 붕괴시킬 것이다
(2024.01.29 방송)
6강 소수민족의 문제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건립됐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헌법에 명시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공식 종교는 시아 이슬람이다
하지만 이슬람 외에도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등도
공식으로 인정하고 있다
즉, 이외에 다른 민족의 종교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이란에는 약 35만 명의 바하이교인들이 살고 있다
바하이교인 대학에 진학할 권리가 없다
오랫동안 이란에서 교육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그래서 해외에서 교육받고 온 바하이교인들은 스스로
청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인가받지 못한 대학교를 세웠다
정부는 대학교 수업이 어디서 열리는지 알아내서
그곳을 습격해 교수와 학생들을 체포했다
바하이교인들은 고용과 보험 정책, 민법 등 법적 권리를 받지 못한다
다른 종교를 믿는 민족도 마찬가지다
소수 민족인 야지디교인은 이란의 남쪽에 살고 있지만
공식 종교로 인정받지 못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종교들도 대부분의 법적 권리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 종교들은 이란 의회에서 각각 한 명의 대표만을 가질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인이 아무리 많아도 대표는 한 명뿐이라는 것이다
이란에 290명의 국회의원이 있다
한 명은 아무힘도 없다
심지어 소수 종교는 대부분의 정치적 권리에서도 배제돼 있다
이란의 가장 높은 지위인 최고지도자는 시아 무슬림이어야 한다
나머지 종교는 그럴 권리가 없다
하지만 종교 내에서 결혼, 이혼, 상속 등이 포함된
그들만의 가족법을 가질 수는 있다
문제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근간에 차별과 분리주의가 자리잡고 있어서
아무리 소수 종교의 가족법을 적용한다 해도 차별 받는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믿는 이란인이 사망했는데 3명이 있다고 해보자
그들 중 한 명이 무슬림으로 개종한다면 모든 재산은 그에게 상속된다
또 다른 문제는 종교의 개종에 관한 것이다
다른 종교인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무슬림이 된다면
그 사람은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무슬림은 기독교인이 될 권리가 없다
배교자로 간주된다
이슬람을 믿는 이란인이 기독교 교회나 조로아스터교 성전
유대교 회당에 가서 개종한다면 종교를 바꾼 무슬림과
개종하라고 전도하고 선교한 사람은 굉장히 강력한 처벌을 받게 된다
종신형을 받게 될 것이다
범죄에 관한 법의 적용도 굉장히 다르다
결혼을 안 하고 남녀가 같이 산다고 해보자
남녀 모두 미혼이라고 했을 때 둘 다 무슬림이라면
법에 의해 그들의 처벌은 태형 100대이다
하지만 여자가 무슬림이고 남자가 유대교나 기독교 등 비무슬림이라면
그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헌법에 평등이 명시돼 있다 해도 의미가 없다
이슬람 종파 중 수니 무슬림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수니들은 무슬림이면서 시아가 아닌 사람들로
이란에 많이 살고 있다
(시아파 90~95%, 수니파 5~10%)
수니파는 시아파와 동등하지 않다
테헤란의 인구는 약 1,200만 명인데
정부는 지금까지 단 1개의 수니파 사원도 짓지 못하게 막았다
수니 무슬림들이 단체로 기도를 하려면 개인적인 장소에서 해야만 한다
소수 종교에 적용되는 차별은 수니파에도 당연히 적용된다
정부는 항상 그들을 눈엣가시로 여긴다
그들의 가장 작은 시민적, 문화적 움직임은 모국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소수의 아이들을 모아 모국어를 가르치는데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으니 몰래 가르친다
종교에 기반한 이 모든 차별의 이유는 하나이다
이란에 종교적 폭정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시아파들도 정부(최고지도자)가 말한 대로 믿고 기도해야 한다
이란의 법은 공식적으로 입법되려면
헌법수호위원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헌법수호위원회는 최고지도자에 의해 임명되고 구성된다
따라서 그가 원하는 것을 법으로 적으면 그게 법이다
이란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민족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쿠르드인, 발루치인, 아랍인, 튀르키예인 등이 살았다
이란의 다양한 민족들은 안타깝게도 중앙 정부에 의해 소외받고 있다
정부 투자가 없으니 식수도 부족하다
정부는 그들의 환경에 관심이 없다
법은 그들을 못 본 체한다
지역의 청년들은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이 없다
석유와 휘발유를 접경국인 파키스탄령 발루치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에 팔아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것을 불법이고 밀수라고 생각한다
적발되면 체포해서 조사하는 대신 간단하게 총으로 쏴 버린다
비옥한 후제스탄 지역에 사는 아랍인들은
석유가 매장된 땅 위에서 가장 빈곤하게 산다
석유 화학 공장에 단순 노동자가 필요해도 중앙에서 데려간다
아랍인을 채용하지 않는다, 그들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차별에 근간해 건설되었고
이러한 차별이 문제의 징후이다이 차별은 독재자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 보려면
소수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된다
그런 면에서 이란은 최악의 성적표를 가지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이란 국민들의 생각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정부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2022년에 시작된 히잡 혁명의 이유다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결국 정권은 붕괴할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차별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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