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1, 2
지은이 이민진
옮긴이 이미정
펴낸곳 (주)문학사상
값 14,500원
![파친코1 표지](https://blog.kakaocdn.net/dn/CnkTF/btricDGiaRG/hJm4JvybeJLMoSRi9AYkW0/img.png)
![파친코2 표지](https://blog.kakaocdn.net/dn/dxBxvT/btrh7x8QQpZ/WXwwBFJ8zLIPsFzjbzMLwK/img.png)
최근에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스테디셀러로도 유명해서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특이한 점은 한국계 미국 작가가 일본에서 산 한국인에 대해 썼다는 점이다. 사실, 이민자의 삶이라는 것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주 먼 이야기 일 수밖에 없다. 작가 또한 실제로 일본에 사는 조선인 수십 명과 인터뷰를 하고 초안을 수정했을 만큼 같은 이민자라고 할지라도 재일교포가 갖는 의미는 또 남다르다. 단순한 차별을 넘어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의 방식마저 강요받아야 했던 모진 운명의 당사자들인 것이다. 번역본은 2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 300페이지 넘는 분량의 책이지만 탄탄한 스토리로 구성되어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1권이 더 재미있기는 했다.
소설은 부산 영도에서 낳고 자란 순자(순자가 작가의 요청으로 2권에서는 선자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바뀐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인 느낌은 순자가 더 좋아서 순자로 하겠다)와 순자의 엄마 양진과의 영도에서의 삶과, 순자가 결혼 후 일본에서의 삶, 그리고 순자의 아들들과 손자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자수는 인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게임에 손님들이 빠지는 이유를 모자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내용 스포 있음)
순자의 차남 모자수는 파친코 가게에서 일하게 된다. 그 당시 일본에서 한국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고 공부를 많이 하건 적게 하건 크게 의미가 없었다. 힘들게 공부해서 명문 와세다에 입학한 모자수의 형 노아도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 결국엔 모두 파친코에서 일하게 된다. 마치, 그것 말고는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일까. 일본에서 낳고 자란 그들은 한국보다는 일본이 더 익숙하고 편했을 것이다. 솔로몬에게는 일본도 한국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할 기회도 있었지만 결국엔 일본에서의 이민자 신분을 선택한다.
교회에서 목사는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지나치게 보살핀다고 말하며, 가족을 숭배하는 것도 일종의 우상숭배라고 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고 안타까웠던 부분은 노아의 죽음이다. 가장 어머니를 이해하고 가족에 헌신했던 사람이라 그만큼 더 배신감이 컸던 것일까. 아니면, 야쿠자의 더러운 피가 섞인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믿었던 엄마가 부정한 여자라고 생각한 것에서 온 증오였을까. 사실, 전쟁 속에서 순자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본다. 왜 끝내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특히, 자식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과한 애정을 쏟아붓고 후에 그에 상응한 부양의 의무를 요구하기도 한다. 순자는 그런 목적으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도 아니었고 단지, 아들이 원하는 바를 이뤄주고자 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배신감에 치를 떨고 화가 나서 안 보고 사는 것까지 그렇다 쳐도 엄마를 다시 봤다고 죽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평생을 거쳐 너희 두 남녀가 나로 대신해 이루려 했던 꿈을 내가 어떻게 망치는지 두고 봐라 이건가. 아니면, 일본에서 사는 한국 이민자의 삶이란 아무리 물심양면으로 지원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어렴풋이 짐작을 해보자면 가족 안에서만큼은 내가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있었는데 그것이 붕괴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이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결국 내 존재를 숨기고 파친코에서 일할 수밖에 없고, 누구보다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었지만 백이삭의 아들이 아닌 나는 결국 고한수의 아들로 살 수밖에 없음에 자괴감을 느끼고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라고 해도 사실 이해하기 어렵긴 하다.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파친코와 같은 삶일 것이다. 소설의 표지도 얼핏 보면 떨잠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파친코 기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제목을 파친코로 설정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라고 본다. 파친코는 이미 수가 정해져 있는 게임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도 이미 운명이 정해진 것처럼 결국엔 자신의 삶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결과를 안다고 뭔가 달라졌을까. 차라리 모르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그 모진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낮은 파친코의 확률에 기대하듯이. 또한, 소설에서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삶을 관통하는 큰 줄기는 결국 가족에 있다. 내 나라 내 조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기에 일본은 이미 그 국가의 의미보다 내 가족이 살아온 삶의 터전이라는 의미가 더 강할 것이다. 그런 그곳이 그들에게는 고향이고 가족이 있는 안식처였을 것이고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 긴 시간을 버텨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어디에 떨어져도 악착같이 살아내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한국인의 끈기와 성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할 수 없는 시대의 비극이 한 가족의 생애를 통해 잘 드러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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