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아버지의 해방일지_정지아

by 상팔자 2024. 2. 16.
반응형

아버지의 해방일지

지은이 정지아

펴낸곳 (주)창비

값 15,000원

 

 

 

하필이면 거기.

 

 

 

말 맛이라는 게 이런 걸까, 진지하고 심각할 법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 나아가는 소설이다

특히, 구수한 사투리가 더해져 이야기와 시너지를 이룬다.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는 내용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요새의 사람들에게는 가끔 정치적 논쟁에서나 듣는 단어인 '빨갱이'인

부모를 둔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둘러 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이념이나 사상을 이야기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억지로 울리지 않아서 좋았고 절로 웃음이 나와서 즐거웠다.

 

 

 

바짓가랑이에 붙은 먼지 한톨조차 인간의 시원이라 중히 여겨 함부로 털어내지 않았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마침내 그 시원으로 돌아갔다_p.16

 

매사 진지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던 아버지는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진지하게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 다시 올 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날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_p.27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눈은 사시가 되고 아이도 가질 수 없는 몸이 된 아버지가

과거의 일을 신이 난 듯이 이야기한다.

병원에서 임신 불가 판정을 받았던 아버지는 아는 한의사가 지어준

약 한제를 먹었고 믿을 수 없게도 '내'가 태어난다. 

 

작은아버지로 지금쯤 빈속에 깡소주를 들이붓고 있을 것이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마주친 형 없는 세상, 탓할 사람 없는 세상이 두려워서._p.41~42

 

작은아버지는 '빨갱이'인 아버지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고 생각하지만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 나름의 가슴 아픈 사정이 있었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하는 것이여."_p.137

 

자신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전장이기도 했던 곳은 아버지의 친구도 있지만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 같은 사람이라며 개의치 않아한다. 

 

아버지가 대단한 것도,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대사회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흔하디 흔한 자리일 뿐이다._p.169

 

아버지는 죽은 친구의 아내와 결혼했고

어머니가 가끔 죽은 남편과 비교를 해도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_p.189

 

아버지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가족의 죽음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둘러싼 수많은 인연들의 '나'에게로 찾아오는 과정이었다.

내가 알던 인연도 있었고 전혀 예상 밖의 인연도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내가 모르던 아버지를 새로 발견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은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_p.195

 

내가 모르던 아버지의 낯선 시간에 싱그러운 청춘의 아버지가 있었다.

누군가의 시간은 과거인 채로 흐르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오늘을 살아야 할 날이 오기도 한다.

 

작은 아버지나 나는 유약해서, 혹은 세상이 좋아져서 한 어깨에 두 짐 못 지는 거라고,
스스로 나자빠진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_p.26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