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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백광_렌조 미키히코

by 상팔자 2023.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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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

지은이 렌조 미키히코

옮긴이 양윤옥

펴낸곳 (주)바이포엠 스튜디오

값 14,500원

 

 

모두가 범인이다

 

 

명배우는 아무도 믿지 못할 그런 거짓말을 너무도 태연히 줄줄 늘어놓은 유키코 쪽이었을까요. 아니면 그게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나 스스로를 속이며 그걸 믿으려고 했던 나였을까요...... p.71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화자가 바뀌면서 범인이 바뀐다는 것이다. 각 챕터마다 등장인물들이 사건이 발생한 날의 사실들을 고백하는데 모두 스스로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낮에 가정집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그것도 불과 네 살 난 여자아이의 죽음에는 공교롭게도 소녀의 가족이 연관되어 있다. 너무나도 조용하고 한적한 그래서 은밀하기도 한 집안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이며 소녀의 죽음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꽤 흥미진진해 보이는 이 소설은 생각보다 중간까지는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흥미를 유발시키기 보다는 혼란을 유발할 만큼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 조금 있긴 했으나 그래도 중반 이후로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 섬은 모든 것이 색채로 넘쳐났다. 바다도 하늘도 한없이 파랗고 하얀 햇빛이며 미적지근한 비까지도 극채색을 내뿜었다._p.12

 

 

일흔이 넘어 가끔 의식이 흐릿해지기도 하는 게이조는 전쟁 당시 남태평양의 섬에서 벌어졌던 사건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작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몇십 년도 더 지난 남태평양의 섬은 잊을 수가 없다. 작열하는 태양과 파란 바다, 무수한 꽃을 매단 넝쿨. 전쟁에 발을 들인 순간 원하든 원하지 않든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소설의 제목인 '백광'은 눈이 부시도록 하얀 태양빛을 의미한다. 태양빛에 가끔은 사물이나 사람이 왜곡된 형상이나 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같은 살인 사건을 두고도 저마다의 이야기와 해석이 따르기도 하는 것처럼. 광기에 눈이 멀어 전쟁을 일으킨 것과 같이 태양빛에 눈이 멀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남태평양의 붉은 꽃과 하얀 태양빛은 어딘가 일본의 국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게이조는 아내의 불륜과 전쟁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하다. 전쟁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아내의 불륜에서 비롯된 분노 등이 뒤엉켜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망상인지 알 수 없다. 

 

 

그때 일은 노출오버 사진처럼 모든 것이 여름 한낮의 하얀 빛에 녹아들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지금껏 분명하게 생각나지 않았는데, 이제야 겨우 깨달았습니다._p.168

정원에서는 오후 내내 차곡차곡 차오른 하얀 빛이 늦더위에 달궈져 그새 쿰쿰한 단내를 풍기고 있었다._p.187

정원에는 아직 하얀 빛이 남아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노는 나오코의 작은 몸이 무성한 풀과 나지막한 나무들 사이를 들락날락하는 모습은 마치 현상하지 않은 음화필름처럼 허연 어린애의 흔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 같아서 나까지 슬며시 무섬증이 들었다._p.255

사건이 터진 그 목요일까지, 일주일 내내 최고기온이 갱신될 만큼 무더운 날씨였다. 여름 햇빛은 자신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썩어 문드러져 집과 정원에 하얀 단내를 쏟아냈다._p.275

바로 옆의 한 그루 나무에서는 무수한 꽃을 매단 넝쿨이 구슬주렴처럼 땅바닥까지 늘어져 있었다. 진한 원색의 꽃이었을 테지만 태양 빛에 녹아들어 내 기억에는 티 없이 하얀 색깔로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_p.289

 

 

죽은 소녀의 모습, 혹은 죽은 소녀가 발견된 장소, 죽은 날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각각의 느낌은 비슷해 보이지만 화자는 각각 다르다. 그러나 소녀의 죽음에 그날의 분위기나 날씨만을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은 개인마다 각각의 죽이고 싶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누가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가 와는 별개로 모두가 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오늘을 살기 위해서 어제의 과오를 잊거나 잊은 척 하지만 어느새 내가 저지른 과오의 흔적들은 나의 그림자를 좇아 한순간에 가차 없이 내게 쏟아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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