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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지식 사이

EBS 위대한 수업 3 (정사 삼국지) 5~10강

by 상팔자 2024. 6. 4.

 

EBS 위대한 수업 3 (정사 삼국지) 5~10강

위대한 백열 여덟 번째 강연 '정사 삼국지' (시즌 3 서른일곱 번째)

 

 

(2024.05.27 방송)

 

 

팡 베이천(Fang Beichen) 중국 쓰촨대 역사문화학 교수

성도무후사 박물관 학술위원

<학자의 눈으로 본 삼국지>

<삼국지 그 감춰진 진실을 찾아서>

<삼국지역주>, <삼국명장> 등 집필

 

 

 

5강  조위 (상) 스스로 길을 개척한 조조

 

 

 

 

촉한의 건국 영웅들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촉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두 나라, 두 왕조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는 북부의 조위이고 다른 하나는 동부의 손오

 

조위는 조조가 세운 나라로 조조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조조의 자는 맹덕으로 후한 패국의 초현 출신이다

초현은 지금의 안후이성 보저우시이다

명의로 이름난 화타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보저우에는 삼국의 명승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조조는 아주 특별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조의 할아버지인 조등은 환관이었다

 

당시의 환관은 궁정 안에서 생활하면서

황제와 황후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었다

궁정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이곳에는 황제의 부인인 황후와 후궁들까지 있었다

남자 시종들이 그 속에서 함께 생활하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어

궁에 들어가 황제와 황후의 시중을 들려는 사람 중

성별이 남자인 경우엔 아주 어릴 때 궁형을 받아야 했다

※ 궁형의 '궁'은 황궁의 궁을 말한다

남자아이가 장차 황실 사람을 섬기려면 생식기를 없애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조등은 환관이라서 후손이 없었지만 후손을 갖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조등은 후한 황궁에서도 권력을 가진 환관이었기 때문이다

권력과 세력을 지닌 데다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양자를 들이게 된다

하후 가문에서 데려온 아이라고 전해졌다

 

그렇게 조등은 양자를 들이고 조숭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숭'은 소림사가 있는 숭산의 숭과 같다

이 조숭이 바로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가 힘 있는 환관이기 때문에

후한 조정에서 쉽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조숭은 일찍이 후한 시기에 중앙 조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직책인 대사농이라는 관직에 있었다

※ 대사농은 전국의 금은화폐나 중요한 물자 관리는 물론

식량 수입과 지출도 관리했다

 

이 관직은 아홉 명의 고관을 일컫는 9경 중 하나

2급 고위 관리에 속하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지금의 중앙은행 총재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조정의 양식을 저장하는 창고에 물자 창고까지 책임졌으니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배를 불릴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quot;alt&quot;:&quot;조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quot;

 

후한 말기에 이르자 왕조가 부패했고

환제, 영제는 공개적으로 매관에 나선다

 

&quot;alt&quot;:&quot;후한의 환제와 영제&quot;

 

조정에서 팔 수 있는 건 바로 관직이었다

매관을 알리는 공고문에는 품계별로 가격이 책정돼 있었다

품계가 가장 높은 관직은 태위로 행정 1급에 해당한다

최고위직은 3개가 있는데 이를 삼공이라고 부른다

 

&quot;alt&quot;:&quot;후한의 최고위직&quot;

 

조정에서 내건 매관 금액은 1억 전이었다

이 사실을 안 조숭은 매관 공고문을 떼 버리며 말한다

"내가 사야겠다"

그렇게 조숭은 1억 전을 내고 태위직을 사 버린다

 

이처럼 조조의 집안은 매우 특이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반적인 사대부와 그 가문에서는

업신여기는 환관 신분이었다

조정의 관리, 군사를 이끄는 장군도 환관을 무시했다

하지만 조조의 아버지는 조정에서 최고 관직을 지냈다

배를 불릴 수 있는 관직이었다

 

이런 집안에서 조조가 정치에 뜻을 품고

집안의 힘을 빌렸다면 출셋길이 탄탄대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조는 본인의 힘으로 정치적 업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정당한 명분과 이치에 맞게 자신의 길을 당당히 개척하고 싶었지만

후한 말기 조정이 이렇게 부패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quot;alt&quot;:&quot;조조의 생각&quot;

 

조조는 곧바로 전략을 바꿔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게 된다

동탁을 토벌하는 군웅할거 시기에 조조도 합류했다

 

당시 조조는 세력이 약하고 군대 역시 훈련이 부족해서

전장에 나가자마자 적군에게 무참히 깨지고 만다

한동한 칩거하던 조조에게 운이 트이는 기회가 찾아온다

누군가 조조에게 연주의 연주목을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quot;alt&quot;:&quot;연주목을 요청받은 조조&quot;

 

조조는 연주로 향하게 되고 이때부터 그의 상황은 달라진다

연주에 온 조조는 자신의 힘을 키워 인재를 모으기 시작한다

조조의 수하들이 걸출한 인재를 찾아내는데 그게 바로 모개이다

 

&quot;alt&quot;:&quot;모개가 조조에게 한 말&quot;

 

'정치와 경제라는 두 가지 과제를 아무도 중요시하지 않는 지금

서둘러 해결해야 천하를 호령하는 토대가 마련될 겁니다!'

 

이를 들은 조조가 매우 기뻐하며 바로 모개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조조는 장안에서 낙양 일대로 도망친 한헌제를

군대를 파견해 자신이 관리하는 연주로 데리고 온다

(조조가 머물던 연주와 불과 몇백 리 떨어진 곳)

허현으로 모셨는데 이곳은 지금의 허난성 쉬창시이다

동시에 쉬창 일대에서 둔전을 실시하는데

※ 둔전은 조직화된 농업 생산을 말한다

 

조조는 군둔민둔을 모두 시행했다

병사들도 땅을 경작하게 하고 일반 농민들도

조직적으로 농사를 지어 식량 생산에 힘쓰도록 했다

조조는 지역을 두고 다투는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승리를 위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2024.05.28 방송)

 

 

6강  조위 (하) 강대국은 왜 멸망했나

 

 

 

 

훗날 이어지는 전투에서 조조는 자신의 강적부터 제거한다

가장 가까운 강적은 여포였다

조조는 줄곧 여포와 겨뤘다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지만 결국 여포를 제거해 버린다

그리고 황하 북부 연안의 가장 큰 세력이자

군웅할거를 이끌었던 원소를 제거한다

 

그렇게 북쪽을 거의 장악한 다음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형주로 남하한다

형주를 점령하려면 이곳의 군정 장관 유표를 물리쳐야 했다

또한 당시 그곳엔 형주로 도망쳐서

유표의 지역에 얹혀살던 유비도 있었다

 

당시 유비는 이미 제갈량을 데리고 있었다

제갈량이 자진해 강동에 있는 손권에게

함께 조조에 대항하자고 설득한다

 

&quot;alt&quot;:&quot;제갈량&quot;

 

그렇게 손권도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결국 양측은 적벽에서 전쟁을 치렀고

결국 조조가 참패한다

 

 

적벽대전은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전투이다

왜냐면 적벽대전 이후에야 조조, 유비, 손권 세 사람이 세운

세 왕조의 세력 형태가 구체화 됐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시기가 적벽대전이 끝난 이후이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한 뒤 북쪽으로 물러났다

중부 지방인 형주에서 유표가 죽게 되는데

이 시기 형주는 상, 중, 하로 지역이 나뉘어 있었다

 

일곱 개 군으로 돼 있었는데 맨 위쪽이 남양군이었다

물러가던 조조가 남양에 주둔할 때 남양군을 점거했다

남양 중간에는 장강이 통과하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곳에

남군과 강하군이 있었다

이곳은 손권이 관리하게 된다

그리고 남부의 비교적 큰 지역은 지금의 후난성 남부이다

대부분 후난성 남부에 위치한 이 4개 군은

장사, 영릉, 계양, 무릉이며 유비가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

 

&quot;alt&quot;:&quot;삼국의 세력과 형태&quot;

 

북부에는 조조가, 동부에는 손권이, 형주의 남부에는 유비가 있었다

이렇게 세 세력의 형태가 구체화된다

훗날 조조는 북부로 돌아간 이후 북부에 남아 있는

소수의 대항 세력을 제거하고 위왕 자리에 오른다

 

조조가 누리는 대우도 황제와 별 차이가 없었다

조조가 죽은 뒤인 서기 220년

조조의 아들 위문제가 제위에 올라 후한 왕조를 끌어내리고

낙양에 수도를 세운다

이리하여 삼국 중 조위 왕조가 가장 먼저 세워진다

 

조비가 재위한 기간은 몇 년 안 된다

40세에 죽었다

 

&quot;alt&quot;:&quot;조위의 초대황제 조비&quot;

 

그럼에도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정치적 업적과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 위문제 업적

 

1. 관료 제도 개혁

군대와 국가를 총괄하는 제도에서 유명한 정치 개혁

후한 초기에는 관료 등급 구분이 매우 복잡했다

그 기준은 매달 받는 쌀의 양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등급에 따라 나뉘었는데 아주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조비가 황제가 된 뒤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가장 먼저 구품중정제를 추진한다

 

&quot;alt&quot;:&quot;구품중정제&quot;

 

인재를 9등급으로 나누는 것이다

여기서 '품'은 품계, 등급을 의미한다

9품은 원래 인재를 평가하는 데에 사용됐다

훗날 사람들은 이 방법이 편하고 구분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좋고 나쁨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고

중간 영역의 인재들도 구분하기 좋다

 

이러한 9품 제도는 관료의 등급에도 사용됐다

관료 등급 제도의 기반은 위문제 때 처음 세워졌다

 

 

2. 동서 교역로 개통 재개

서역으로 가는 길을 다시 개통

전한 시기에 장건이 서역 교통로를 개척했는데

위문제 때 다시 길이 열린 것이다

 

&quot;alt&quot;:&quot;실크로드를 개척한 전한의 외교관&quot;

 

 

3. 문화 산업 육성

중국의 대백과사전 편찬

 

&quot;alt&quot;:&quot;중국의 백과사전 황람&quot;

 

문화적으로 획기적인 공헌이었다

위문제 본인도 문학가여서 문학 비평을 장려했다

다른 작가들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걸 권장하다 보니

문학 비평의 새로운 기풍이 생기게 된다

 

&quot;alt&quot;:&quot;문심조룡&quot;

 

조비는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전체 재위 기간 동안 비교적 많은 공헌을 했다

 

&quot;alt&quot;:&quot;중국 조위의 2대 황제 조예&quot;

 

남부의 촉한과 동남부 손오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  위명제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문란하고 방탕한 사생활을 들 수 있다

궁궐을 짓는 데 막대한 돈을 쓰고 

수많은 미녀를 후궁으로 들였다

궁궐엔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살았다

위명제는 궁정에서 하루 종일 미녀들과 시간을 보냈다

 

⊙  위명제의 오점

1. 내부의 위기 파악 실패

당시 조위 왕조에는 특별한 가문이 있었다

세력이 아주 강한 가문이고 대대로 벼슬을 지냈다

이들의 힘은 정계에 깊게 침투해 있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야심도 있었다

 

 

위명제가 이 숨겨진 위기를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사마씨 가문이 서진 왕조를 세우고 조위 왕조를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멸망의 씨앗이 위명제가 재위하던 시기에 뿌려진 것이다

 

2. 미흡했던 건강 관리

재위 기간이 짧았고 사마씨 가문의 정계 활동에 제동을 걸 수가 없었다

 

3. 후계자의 부재

위명제의 황후와 후궁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다

 

위명제가 죽은 두 조위 왕조에서는 3명의 젊은 황제만이 권력을 잡는다

조씨 가문의 방계 후손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해야 했는데

나이가 많은 사람을 후계자로 추천하려 하지 않았다

말을 안 들을 게 뻔하니 어린아이만 가능했다

하지만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건 사마씨 가문에겐

권력을 키우면서 자리를 뺏을 절호의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위명제가 죽고 나서 3명의 어린 황제가 연달아 즉위했고

조정 내부에서는 자리를 쟁탈하려는 피바람이 불게 된다

사마씨 가문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통해

마침내 조위 왕조를 장악하게 된다

그리하여 265년에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서진 왕주를 세우고

조위 정권은 여기서 끝이 난다

 

 

 

 

(2024.05.29 방송)

 

 

7강  손오 (상) 권력을 잡은 19살 청년

 

 

 

 

&quot;alt&quot;:&quot;손오의 초대 황제 손권&quot;

 

손권의 고향은 당시 오군의 부춘현이다

부춘현은 지금의 저장성 항저우시 푸양구이다

지금도 손권의 고향인 이곳에는 삼국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서

매년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손권은 중급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손권의 아버지 손견은 일찍이 후한 말기에

중급 행정관인 군 일급 태수를 지낸 적이 있다

또한 손견은 군대 통솔 능력도 뛰어나 장군으로도 지냈다

우리가 앞서 얘기했듯 손견은 동탁의 장수 화웅과 겨루고

화웅을 죽인 인물이다

 

손견은 아쉽게도 훗날 양양의 현산에서 적을 추격하다가

적이 준비한 매복에 걸려들었고 복병의 화살에 머리를 맞아

영웅의 인생을 마무리한다

 

손견에게는 아들이 네 명 있었다

맏아들이 손책, 둘째가 손권이다

손견이 죽은 뒤, 맏아들 손책이 그의 부하들을 거느리게 된다

당시 손책은 군웅할거의 세력 중 비교적 강력한 세력인

원술의 부하였다

손책이 젊었을 때 원술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부탁드리건대 제게 병마를 주십시오

제가 병마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겠습니다

강남에 있는 제 고향 일대에 가서 세력 확장의 기반을 다지겠습니다"

원술은 손책에게 매우 작은 규모의 군대를 준다

그렇게 손책은 장량의 북부 연안까지 간다

그리고 강을 건너려 할 때 아주 친한 친구를 만나게 되는데

그 인물이 바로 주유이다

 

주유는 손책을 위해 경비를 지원하고

수천 명의 군사를 모으는 걸 도와주었다

사심 없이 손책을 도왔다

손책이 강남을 치는 것까지는 순조로웠다

장강 이남의 가장 풍요로운 지역인 오군의 오현을 금세 점령했다

행정 중심지인 오군의 대부분과 다른 군까지 점령한 것이다

그렇게 금세 강남에서 좋은 기반을 다지게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손책 역시 젊은 나이에 

장강 남부 연안에서 사냥을 하다가 원수의 가문이 보낸

자격을 만나는데 자객이 쏜 화살에 머리를 맞고 만다

현장에서 죽고 만다

 

손책의 아버지인 손견도 손책 자신도 날카로운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그로 인해 고작 19살인 손권이 강동 일대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무대 위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뒤를 이어 이 지역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손권이 뒤를 이을 당시는 손책이 갑자기 화살을 맞고 죽은 뒤라

정세가 불안정했다

 

그래서 손권은 힘든 상황에도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손권은 주변에 있는

매우 충성스러운 부하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그중에서도 손권에게 가장 큰 힘이 돼주고

동시에 능력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 바로 주유였다

손권은 강동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손권은 주변의 약소한 군사 세력을 흡수한다

서기 208년에는 삼국시대에서 대표적이고 기념비적인 전쟁이

발발하는데 바로 적벽대전이다

 

&quot;alt&quot;:&quot;적벽대전에서 양주를 소탕하려한 조조&quot;

 

이 긴박한 시기에 조조는 남부를 향해 전쟁을 선언하는 글을 써서 보낸다

80만 병마를 거느리고 강동을 평정하겠다는 내용이다

실제 조조의 병력은 역사적 고증에 따르면

대략 20만 초반 정도이다

 

&quot;alt&quot;:&quot;적벽대전을 두고 의견이 갈린 주유와 장소&quot;

 

주유를 중심으로 한 주전파는 맞서 싸워야 한다고 단호히 주장했고

일각에서는 장소를 중심으로 한 무리가 투항을 주장했다

이 결정적 순간에 손권은 영웅적 지도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손권은 주유의 말에 동의하고 조조와 끝까지 싸우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주유는 수만이 넘는 병마를 이끌고 상류로 진입한다

적벽에서의 교전에서 유비와 연합해 조조의 부대를

참패시키고 겁에 질려 도망치게 만든다

 

이로써 삼국정립의 상황이 시작되게 된다

손권 세력은 조조를 물리친 다음 곧바로 하류의 양주에서

중류의 형주까지 뻗쳐 나가게 된다

손권이 강동에 있을 때 적벽대전에서 승리하기 전이다

 

당시 손권에게는 지혜로운 부하가 있었다

노숙이라는 인물인데 그가 손권에게 말한다

"가능하다면 장강 유역을 완전히 점령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장강 이남의 땅이 우리 소유가 될 것이고

이를 밑천 삼는다면 천하를 다투는 데 문제없을 겁니다"

훗날 손권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전략을 세울 때

노숙의 제안을 우선적으로 따랐다

 

전쟁 상황이 전개되자

 

&quot;alt&quot;:&quot;노숙의 제안&quot;

 

처음으로 쌍방 간의 안정적인 형세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손권이 원했던 건 여전히 장강 중류와

상류 지역이었다

 

&quot;alt&quot;:&quot;손권이 원했던 상류지역&quot;

 

하지만 형주의 남군을 유비에게 빌려준 뒤

영토 확장의 통로가 막혀 버리고 만 것이다

형주라는 큰 기반을 얻은 후 유비가 처음 한 말은

남군 지역의 통로를 빌려 익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익주에 들어온 뒤 남군을 손권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남군을 돌려주지 않자 손권과 유비 사이엔 이해 충돌이 생겼다

훗날 손권은 다시 인재를 발택한다

노숙이 죽은 뒤, 손오를 이끄는 장수 자리를 여몽이 이어받는다

여몽은 촉한을 상대로 무력을 쓰는 정책을 주장했다

돌려주지 않는다면 되찾아야 하며 그들이 이를 거부한다면

무력으로 빼앗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형주에 있던 관우의 후방을 몰래 공격해

형주의 남군을 되찾고야 만다

원래는 유비 소유였던 형주 영토가 이렇게 손권에게 완전히 돌어가게 된다

손권의 세력 범위는 서쪽으로 계속 확장해 삼협의 동쪽 입구까지 닿게 된다

그 이후 유비가 황제로 즉위한다

황제에 즉위한 뒤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한다

손오를 쳐서 형주를 되찾으려고 한 것이다

 

바로 이때 손권은 전략적인 안목을 보여 준다

당시 조위에서는 위문제 조비가 재위하고 있었는데

손권은 조비에게 마취제를 놓는다

조위 전체를 마비시키려 한 것이다

그래서 조위의 신하를 자처해 대량의 공물을 바친다

그렇게 북부와 좋은 관계를 맺는다

두 나라를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위문제도 손권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손권이 유비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데에 전념할 수 있었다

삼협 동쪽 입구 근처에는 이릉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또 한 차례 큰 전쟁이 일어난다

 

당시 손오의 장수는 육손이었다

육손은 불을 이용한 공격으로 유비의 막사를 불태워 대승을 거두고

유비는 어쩔 수 없이 삼협 서쪽 입구, 영안으로 도망친다

이리하여 손권은 형주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형주를 손에 넣었을 뿐 아니라 서쪽에 있는 유비 대군의 위협까지

효과적으로 제거했다

 

이후 손권은 다시 한번 육손을 장수로 파견한다

장강 이북의 회남의 북쪽 연안

즉 회남의 석정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조위 대군을 무찔렀다

결국 서쪽과 북쪽의 위협을 거의 해소하기에 이른다

 

 

 

 

(2024.05.30 방송)

 

 

8강  손오 (하) 반평생만 훌륭했던 군주

 

 

 

 

외부 정세가 매우 유리한 상황에서

손권은 일단 왕위에 오른 다음 나중에는 황제가 된다

황제로 즉위한 곳은 무창(후베이성 어저우시)이다

당시엔 악현이라고 불렀다

 

손권은 19세 때 형의 자리를 이어받아 마침내 황제가 된다

본인의 업적에 정점을 찍은 것이다

왜 손권은 인생 후반부에 어리석어진 걸까?

 

외부의 위협이 거의 해소되자 외부적으로 큰 압력이 없다 보니

내부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부 갈등은 손권의 집안에서부터 시작된다

손권의 문제는 가족 간 관계를 잘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손권은 후계자를 선택할 때 위명제와 달랐다

 

위명제는 후계자가 될 아들이 전혀 없었지만

손권은 후계자가 될 아들이 많았다

재능과 성품을 겸비한 아들을 선택해

후계자로 삼아야 하는데 손권은 그러지 못했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판단하고 심지어 후궁의 말을 믿었다

이럴 때 중국인들은 '베갯밑공사'라는 표현을 쓴다

잠자리에서 여인이 속삭이는 대로 손권이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손권은 후계자를 책봉할 때 심각한 실수를 반복하고

손권의 아들들은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면서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각자 조정에서 친한 신하를 찾아가 지지를 호소했다

결국 집안사람들 사이에서 비롯된 갈등이

중앙 조정 대신들 사이의 갈등으로 확대됐다

 

이렇게 손오의 정치적 상황은 정점에 이르렀다가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한다

 

&quot;alt&quot;:&quot;70살이 넘게 산 손권&quot;

 

70살이 넘게 살았다

하지만 손권이 죽은 뒤 남겨진 손오 정권은

내부 모순이 심각한 상태였다

후반기에 접어든 것과 다름없었다

 

손권은 인생의 전반부에서 굉장히 현명했고

후반부에 가서는 어리석었다

손권이 죽은 뒤 연달아 세 명의 젊은 군주가 왕위에 오르는데 조위와 비슷하다

조위 위명제가 죽었을 때도 세 명의 어린 황제가 재위했다

 

손권이 죽자, 손오에서도 연달아 세 명의 젊은 황제가 재위했는데

공정한 선발 과정을 거쳐 선택된 것도 조정에서 만장일치로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세 명의 군주가 재위할 때마다 조정 내부와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더 최악은 손오 말기에 일어난다

마지막 군주는 손호였는데 손권의 손자이다

손호의 재위 기간은 꽤 길었지만 어리석은 데다 주색에 빠져 살고

악랄하기 짝이 없는 황제였다

오직 자기 향락에만 관심을 갖고 무고한 사람을 마구 죽였다

걸핏하면 살인을 저질렀는데 그 방법이 무척 잔인할 때가 많았다

 

서기 280년에 서진 왕조가 세워진 뒤

북부의 서진 정권은 한창 승승장구하는 상태였다

반면 남부에 있던 손호는 손오 정권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세웠다

그래서 서진 대군의 거대한 함대가 장강삼협에 내려왔을 때

손호는 별다른 저항 없이 투항했다

삼국시대에는 항복의 뜻으로 흰색 깃발을 들었다

손호가 투항하자 서기 280년에 삼국은 다시 통일하게 된다

 

 

인생 전반부에 드러난 손권의 영웅적인 기개는

후대에도 칭송을 받고 있다

동시대 인물인 조조도 손권에 대한 칭찬을 많이 했다

조조는 일찍이 회남에서 손권과 전투를 벌인 적이 있다

손권이 수군 군선을 이끌고 조조 진영 앞을 정찰할 당시

잘 맞춰진 군선의 대열과 차갑게 빛나는 무기를 멀리서 본 조조는

탄성을 금치 못하며 이렇게 말했다

 

&quot;alt&quot;:&quot;아들을 낳으려면 손권 같은 아들을낳아야 한다&quot;

 

손권과 손오 정권은 서기 280년에 멸망했다

하지만 손오는 우리에게 고고학적 유물을 풍부하게 남겼다

 

&quot;alt&quot;:&quot;손오의 오간&quot;

 

안후이성 마안산시에서 손오의 장수인 주연의 묘가 발굴됐는데

그곳에서도 여러 유물, 예를 들어 칠기가 있다

 

 

중요한 점은 당시 실제로 사용되었던 의장품이었다

그중 하나가 당시 손오의 장군인 주연이 사용한 명함이다

주연의 명함의 종류는 공식 석상에서 쓴 사이즈가 큰 명함과

일반 사교 모임에서 쓴 작은 사이즈가 있다

 

&quot;alt&quot;:&quot;주연의 명함&quot;
박물관에 있는 주연의 작은 명함을 본뜬 것

 

'자'는 칼을 뜻하는데 너비나 길이로 볼 때

우리가 쓰는 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목자'라고 불렀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명함이다

 

&quot;alt&quot;:&quot;주연의 명함 풀이&quot;

 

요즘 몸 상태가 어떤지 즐겁게 지내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quot;alt&quot;:&quot;주연의 명함 풀이2&quot;

 

상대를 호칭할 때는 자를 써야 하고 자신을 호칭할 땐 이름을 써야 한다

'자 의봉'을 작은 글씨로 써서 겸손을 나타낸 것이다

 

☞  첫 번째, 출생지(본적) 두 번째, 성과 이름 인사말 그리고 '자 의봉'이다

이렇게 명함을 주면 상대는 '의봉,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상대도 자신의 명자를 주면 상대의 자를 알 수 있고

서로가 예의를 갖춰 대화할 수 있다

이 작은 물건으로 삼국시대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현재 우리 삶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단 점이다

우리도 명함을 쓰기 때문이다

 

 

 

 

(2024.05.31 방송)

 

 

9강  촉한 (상) 한계를 극복한 유비

 

 

 

 

촉한의 창업 영웅들을 이끈 인물 유비

 

유비의 자는 현덕이고 그의 고향은 탁군의 탁현이다

(후한 유주 탁군의 탁현인데 현재 허베이성 줘저우시이다)

유비는 북부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서 기록을 기준으로 유비 집안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전한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으로 나온다

 

&quot;alt&quot;:&quot;중국 전한의 황족 유승&quot;

 

전한의 유씨 황족은 매우 큰 가문으로 뻗은 가지가 많다

 

유비는 후한 말기에 태어났다

후한 말기는 천하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정세가 요동치는 시기였다

사실 유비는 어리고 젊었을 때부터 몇 가지 특징을 보였다

먼저 외모에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quot;alt&quot;:&quot;유비 외모의 특징&quot;

 

유비가 황실의 후예이긴 하지만 먼 방계이기 때문에

전한 경제 때부터 유비의 세대까지는 꽤 멀었다

먼 방계 친족이다 보니 유비의 가문 중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비교적 작은 관직을 지냈을 뿐이었다

게다가 유비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웠다

 

유비의 어머니가 돗자리를 팔고 신발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막노동을 하거나 돈 안 되는 장사로 생활비를 번 셈이다

유비를 삼국시대 다른 리더들과 비교한다면

유비의 창업 조건이 최악이었다

 

정치적 자원 부족

유비의 아버지가 현급 관리였지만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원이 없었던 데다 가문의 힘도 없었다

친형제도 없었고 가문에 유비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quot;alt&quot;:&quot;청두 무후사&quot;

 

그래서 유비가 아주 젊었을 때 관우,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었던 것이다

본인 가문의 힘이 약하니 성이 다른 사람들 중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유비가 10대 청소년이던 시절 이웃 아이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유비네 집 옆에 엄청나게 큰 뽕나무가 있었다

그 길이가 몇 장에 달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10여 미터 정도이다

잎도 아주 무성했는데 나무 머리 쪽 잎들이 아주 풍성했다

멀리서 보면 당시 황제가 타던 호화로운 마차와 닮았다

 

&quot;alt&quot;:&quot;황제 전용 마차 우보개차&quot;

 

당시 황실에서 사용한 수레를 보면 수레 윗부분에

덮개가 있어서 화려한 깃털로 장식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함께 즐겁게 놀았던 그날

유비가 큰 뽕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커서 저렇게 풍성한 차개가 달린 우보개차를 탈 거야'

 

당시 아이들은 우보개차가 뭔지도 몰랐다

유비는 다른 어른한테서 황제가 우보개차를 탄다고 들은 것이다

 

유비가 그런 말을 하자, 옆에 있던 집안의 어른이 경악했다

먼 친척인 이 사람이 이 말을 듣곤 유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런 식으로 허튼소리 하게 두면 안 됩니다'

'황제의 우보개차를 타고 싶다 말하면 관청에서 엄벌을 내릴 거예요'

'자칫하다간 목이 날아갈 수 있으니 입 단속시키고 당장 공부시키세요'

그래서 유비의 어머니는 어렵게 번 돈을 한데 모아

유비를 대학자에게 보내는 데 쓰게 된다

 

&quot;alt&quot;:&quot;충국 후한의 학자 노식&quot;

 

제갈량을 만나기 전까지 유비의 창업 과정은 무척 고달팠다

후한 말기 황건적을 진압할 때부터 유비의 창업은 시작됐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이후 유비는 또 다른 방법으로 창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조금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 금방 실패해 버린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서 창업하고 성공한 뒤 또 실패했다

오뚝이 같은 것이 유비의 장점이다

악착같이 버티고 계속되는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

 

 

유비의 성공 비결

 

1. 악착같은 인내심

2. 냉철한 반성

실패하고 나면 유비는 왜 실패했는지

실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분하게 생각할 줄 알았다

3. 인재를 중시

 

유비의 마지막 업적은 이 세 장점이 합쳐져 가능했다

 

창업을 시작했다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던 유비는

유표가 있는 형주로 도망갔다

유표가 있는 곳에서 일종의 지원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서 7년을 지내면서 이뤄낸 게 아무것도 없었다

 

&quot;alt&quot;:&quot;유비의 말&quot;

 

유비는 좌절하더라도 남을 탓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원천우인하지 않았다

 

&quot;alt&quot;:&quot;원천우인&quot;

 

왜 이렇게 번번이 실패하는 걸까 고민했다

마침내 유비는 깨닫는다

 

&quot;alt&quot;:&quot;책사의 필요성을 깨달은 유비&quot;

 

그래서 수소문하여 알게 된 인물이 아주 유명한 와룡 선생이었다

바로 제갈량이다

 

&quot;alt&quot;:&quot;중국 촉한의 재상 제갈량&quot;

 

형주의 행정 중심지인 양양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진

융중이라는 지역에 있었다

제갈량은 여기서 10여 년간 직접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한편으로 항상 바깥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다른 한편으론 누군가를 기다렸다

자신이 보좌할 만한 인물을 기다린 것이다

유비는 제갈량을 찾아갔는데 연이어 세 번을 방문했다

 

&quot;alt&quot;:&quot;삼고초려&quot;

 

유비를 만난 제갈량은 그에게 향후 발전 전략 계획을 제공한다

이 계획은 모두 <삼국지>의 <제갈량전>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제갈량과의 만남은 유비의 창업에 매우 큰 역할을 한다

바로 이때부터 유비의 창업 과정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2024.06.03 방송)

 

 

10강  촉한 (하) 제갈량은 왜 유비를 섬겼나

 

 

 

 

유비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양양을 대표하며

교양과 연륜을 겸비한 사마휘였다

유비는 사마휘에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제가 지금 창업을 잘해 보려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창업을 하기 위해 어떤 실무를 봐야 하는지를 이미 노쇠해 버린 내가 어찌 알겠는가.'

 

여기서 실무란, 마땅히 해야 할 정치상의 사무를 말한다

 

'나도 모르겠네. 실무를 정말 알고 싶거든 마침 이곳에 와룡이 있다네.'

유비는 그 이름을 듣고 와룡이 누군지 물어본다

사마휘는 그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유비는 양양에 살고 있던 당시 유명인 서서에게 말한다

'자네에게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있다고 들었네

와룡이라 불리던데 그가 제갈공명이 맞는가?'

'물론입니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지요.

그를 만나고 싶으십니까?'

유비가 만나고 싶다고 대답한다

 

서서는 유비에게 제갈량을 강력히 추천하며

제갈량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그를 만나면 뭘 해야 하는지 귀띔한다

사마휘 어르신도 추천했고 서서도 추천했으니

공명이라는 자가 분명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유비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정말 대단한 인재라면 자기를 위해 일해 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찾아가게 된다

 

&quot;alt&quot;:&quot;삼고초려의 배경&quot;

 

그렇게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러 세 번을 찾아갔고 결국 만나게 된다

제갈량은 유비를 보자마자 향후 창업을 위한 발전 전략 계획을 제시한다

 

 

유비의 삼고초려 끝에 이뤄진 만남,

제갈량은 왜 유비와 협력하기로 한 걸까?

 

일반적으로 후세에 이뤄진 연구에서는

유비와 제갈량이 만나는 대목에서 유비의 행동을 칭찬한다

유비가 여러 번 찾아간 점을 칭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두 사람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1. 나이

당시 유비는 47살이었고 제갈량은 겨우 27살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조금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본인이 선배이니 후배가 와야 한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찾아갔다

2. 경력

유비는 34살에 창업을 시작했고 관직에 올랐다

47살까지 총 23년이나 일했다

반면 제갈량은 줄곧 융중에서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민이었다

한 번도 관직에 오른 적 없고 관리나 병사로 지낸 적도 없다

3. 지위

후한 조정 아래에는 13개의 주가 있었는데

당시 주는 현재 성의 면적보다 조금 더 컸다

그래서 주의 행정 장관이 되는 건 매우 대단한 일이었다

유비는 예주목이라는 직책을 지냈다

당시 주의 행정 장관은 호칭이 두 가지였다

 

&quot;alt&quot;:&quot;주의 행정장관&quot;

 

유비는 행정 차원에서 예주목으로 지낸 경력이 있다

군사 차원에서는 군사를 거느리며 싸웠고

후한 조정에서는 그런 유비에게 좌장군 직함을 정식으로 내렸다

 

당시 후한 조정의 고급 장군 중 최고위직은 대장군이었다

 

&quot;alt&quot;:&quot;후한의 고급 장군 계급&quot;

 

이것이 바로 고급 장군에 속하는 계급이다

여기서 유비는 좌장군을 지냈다

유비와 제갈량의 나이, 지위, 경력이 비슷했다면

유비가 한 번, 두 번, 세 번을 찾아갔을 때

제갈량이 감동하고 격려를 받는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보다 나이와 경력이 많고 정치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자신의 집에 온 것이다

 

&quot;alt&quot;:&quot;제갈량의 출사표&quot;

 

제갈량은 유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부터 유비를 죽을 때까지 섬기기로 다짐했다

만약 제갈량이 유비를 보좌하지 않았다면

조조가 이듬해 북부에서 쳐들어왔을 때 형주에 있던 유비는

허겁지겁 도망쳤을 것이다

 

오히려 손권과 결탁해 조조와 맞서 싸우려 했고

손권도 유비와의 연합을 원했는데 제갈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가 제갈량을 얻고 나서 대업의 준비 과정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제갈량이 보좌한 이후 상승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때 유비는 네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첫 번째 계단은 이듬해 발발한 적벽대전

 

제갈량은 유비에게 이렇게 간청한다

'주공, 저를 강동으로 보내주십시오.

손권 장군을 설득해 동맹을 맺겠습니다'

 

이때 제갈량은 외교관의 역할로 손권에게 찾아간다

손권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하고 손오와 연합해 

적벽대전을 멋지게 치르게 된다

 

적벽대전을 치른 뒤 유비의 행보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유비에겐 작은 근거지가 있었는데 얼마 안 가 빼앗기고

이어서 다른 근거지마저 빼앗기게 된다

확고한 근거지를 갖고 있었던 적이 없다

 

&quot;alt&quot;:&quot;적벽대전 이후 유비의 행보&quot;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 익주로 진출할 기회를 맞게 된다

그리고 유비는 익주에 들어간 뒤 성도를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성도를 치는 데 실패하자 급히 제갈량을 부른다

 

&quot;alt&quot;:&quot;성도를 공격하려한 유비&quot;

 

그렇게 익주 군대를 증원하게 된다

형주는 관우가 지키도록 했다

그 결과 제갈량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성도를 무너뜨린다

성도를 정복한 뒤 익주에서 북부 한중군을 제외하곤

대부분 지역을 유비가 점령하게 된다

 

따라서 유비는 형주 남부 4군을 점령한 뒤 익주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자신의 근거지를 넓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도약이었다

 

세 번째 도약은 뭘까?

얼마 후, 유비는 대군을 거느리고 북부로 가서 한중을 공격했다

한중은 조조가 장악하고 있던 곳이다

후방은 제갈량이 지키고 있었다

제갈량은 후방에서 군량 공급선을 확보했다

그렇게 유비는 한중군까지 점령해 익주 전체를 차지하게 된다

이때 유비는 한중에서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유비가 인재를 중시했고 최선을 다하여 진정성 있게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유비는 어떤 일이 닥쳐 좌절을 겪게 됐을 때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다른 데서 원인을 찾지 않고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곤 했다

 

그런 판단력이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을 찾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 두 사람 사이의 큰 격차를 게의치 않고

제갈량의 집에 찾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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