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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지식 사이

EBS 위대한 수업 3 (정사 삼국지) 1~4강

by 상팔자 2024. 5. 27.

EBS 위대한 수업 3 (정사 삼국지) 1~4강

위대한 백열 여덟 번째 강연 '정사 삼국지' (시즌 3 서른일곱 번째)

 

 

(2024.05.21 방송)

 

 

팡 베이천(Fang Beichen) 중국 쓰촨대 역사문화학 교수

성도무후사 박물관 학술위원

<학자의 눈으로 본 삼국지>

<삼국지 그 감춰진 진실을 찾아서>

<삼국지역주>, <삼국명장> 등 집필

 

 

 

1강  삼국지는 어떻게 쓰였나

 

 

 

 

중국은 1,700여 년 전만 해도 창업 영웅이

쏟아져 나온 삼국시대였다

당시 건국 영웅들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서가 바로

불후의 역사적 작품인 진수의 <삼국지>이다

 

 

⊙ 역사 기록의 양식

 

중국 고대에 역사를 기록할 때

당시 역사서는 크게 두 가지 양식의 역사서를 채택했다

 

그중 하나는 편년체이다

편년체는 연도에 따라 해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인물이 관련되어 있는지 써 내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훗날 한대에 이르자 사마천이라는 천재적인 역사가가

<사기>를 집필하면서 새로운 방식의 기전체를 사용한다

 

&quot;alt&quot;:&quot;사마천의 사기&quot;

 

기전체의 '기'는 사실상 '본기'라는 뜻인데

'본기'란 역대 왕조의 군주가 재위했던 기간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quot;alt&quot;:&quot;편년체와 기전체의 차이&quot;

 

기전체 형식으로 쓰인 <사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사마천이 쓴 역사서가 아주 완전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의 흐름은 물론 주요 사건의 관련 인물도 기록돼 있어서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사마천이 본보기를 보인 이후

후대의 뛰어난 역사가들이 사마천의 방식을 끊임없이 모방했다

 

&quot;alt&quot;:&quot;사마천의 사기 이후의 책들&quot;

 

진수로 말할 것 같으면 자(字)는 승조로

태어났을 때 국적은 촉한이었고 이곳에서 관직에도 올랐다

파서군 안한현 출신(지금의 쓰촨성 난충시 시내에 해당)이다

 

 

♧  진수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촉한 정권에서 30대의 나이까지 벼슬을 했다

그 후 촉한이 멸망한 뒤에는 북쪽으로 이주해

서진 왕조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관직을 지냈다

그러니까 진수는 삼국의 촉한 정권에서

풍부한 벼슬 경력을 쌓았던 것이다

 

그래서 진수는 촉한 왕조의 국가기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든 정세를 잘 알고 있었다

훗날 그가 <삼국지>의 촉한 부분을 쓰는 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게 된다

촉한이 멸망한 뒤 진수는 북쪽으로 가서

조위(조조가 세운 위나라)에 있었다

뒤이어 조위가 서진 왕조로 바뀌면서

진수는 서진에서 또다시 문서 담당 관직을 맡게 된다

 

중앙 조정에는 역사서를 쓰는 부서가 있었다

물론 조위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서진 왕조는 훗날 손오(손권이 세운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

손오 왕조에 대한 역사 문서 기록을 손오의 수도인 건업

다시 말해 지금의 장쑤성 난징에서 북방에 있는 서진 왕조의

수도인 낙양(지금의 중국의 허난성 뤄양시)으로 모조리 옮겼다

 

뿐만 아니라 진수는 어려서부터도 남달랐다

촉한의 유명한 학자인 초주 밑에서 공부했고

학문적 기초를 잘 다지게 된다

특히 역사서 집필에 대한 기초를 쌓은 것이다

게다가 벼슬 경험도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진수는 이 세 나라의 자료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진수는 당대인 삼국시대의 역사서를 집필하기에

최적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 삼국지의 구성

 

진수가 쓴 <삼국지>는 총 65권이다

최종 편찬이 끝난 시기는

서진 왕조의 두 번째 황제 혜제가 제위한 시기였다

※ 삼국지의 집필 기간(247년~297년)

 

진수가 집필한 역사서 <삼국지>는 세 왕조의 인물들에 따라

삼국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각 나라마다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띠고 있다

 

이를테면 <삼국지>는 총 65권인데

이 중 조위 부분은 30권이며 촉한은 15권 분량이다

20권으로 구성된 손오까지 다 합치면 65권이다

(위서: 30군 / 촉서: 15권 / 오서: 20권)

 

세 나라의 인문들이 얽히고설킨 사건에 대해 기술할 경우

진수는 이 중 한 왕조의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그 사건을 다뤘다

물론 기타 인물의 전기에도 관련된 내용을 일부 기록했다

 

♠  적벽대전의 예

이 전쟁에는 세 나라 모두 참가했다

진수에게 중요한 건 승리한 쪽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특히 승리한 나라의 주요 참전 인물이었다

 

&quot;alt&quot;:&quot;손오를 중심으로 서술된 적벽대전&quot;

 

물론 다른 인물들도 있는데 촉한에는 제갈량이 있다

제갈량이 강동에 가서 손권을 설득한 다음

두 정권이 연합해 북방의 조조를 쳤기 때문에

제갈량 열전에도 반영돼 있다

 

상대적으로 북방의 조조는 패배한 쪽이라

비교적 묘사가 덜 되어 있다

그래서 <삼국지>의 '기'는 중심 사건을 인물에 따라

나누어 설명한다

 

그렇지만 분리된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수도 있다

사건 묘사가 사건의 주요 인물에 집중돼 있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하면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나

특정 인물의 일생을 비교적 충실히 반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수가 집필한 <삼국지>의 특징이다

<삼국지> 65권에는 총 54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정식으로 소개된 인물을 포함해 부수적인 인물들도 있다

<삼국지>는 삼국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삼국의 태동 단계부터 시작된다

서기 184년 황건적의 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서기 280년 손오 왕조가 서진 대군에 함락되고

천하가 다시 통일되는 96년간의 역사가 바로 이 책에 담겨 있다

 

진수가 쓴 이 역사서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온 이후

학자들과 후대의 민중들, 그리고 고위 관료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널리 전해져 온 것이다

 

 

⊙  삼국지 판본의 종류

 

<삼국지>는 2천 년 가까이 전해 내려온 불후의 역사서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전해 내려왔기 때문에

<삼국지>의 판본은 굉장히 다양하다

 

가장 오래된 판본은 손으로 직접 베껴 쓴 수사본이다

이는 서진 왕조 때 세상에 나온 뒤 당대 후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수사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것도 책 전체가 아니라 단편적이거나 완전하지 않은 글이다

 

두 번째 종류는 간인본(목판, 활판, 석판 등에 새겨 인쇄한 책)

간인본이 처음 나왔던 시기는 북송시대이다

북송 시대부터 청대까지 판본은 대부분 간인본이었다

가장 오래된 간인본은 목판 전체에 새겨 찍어냈다

목판 하나가 책 한 장 분량이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간인본 중 가장 오래된 건 송대의 간인본이다

남송 시대로 추정된다

 

&quot;alt&quot;:&quot;삼국지 판본 백납본&quot;

 

옷이 찢어지면 헝겊을 덧대어 깁듯이

한쪽이 찢어지면 이곳을 깁고 구멍이 100개면 헝겊 100개로 덧댄다

예전엔 가난한 사람들 옷을 이렇게 묘사했다

헝겊에 헝겊을 덧댄 것을 바로 백납본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백납'이라는 단어는

순수한 최초의 판본이 아니라 다양한

파본을 한데 붙인 것을 가리킬 때 쓰게 된다

 

한 가지 유형의 판본이 널리 퍼지는 과정에서

책 일부가 훼손되고 분실될 수도 있다

다른 판본을 이용하되 남은 부분에 다른 판본을 덧대는 것이다

이렇게 덧붙이기 때문에 백납본이라고 한다

 

활자본이란 활자로 찍은 것이다

한 글자씩 활자를 새긴 다음 합판 위에 활자 여럿을 조합해

완전한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quot;alt&quot;:&quot;흠정 삼국지&quot;

 

제1책에서는 조위, 조조를 다룬다

이것이 첫 번째 권으로 '무제기'이다

 

&quot;alt&quot;:&quot;흠정 삼국지 중 무제기 내용&quot;

 

<삼국지>는 중국 역사서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책이다

삼국시대를 연구할 때 <삼국지>를 가장 먼저 선택한다

 

&quot;alt&quot;:&quot;삼국지의 장점&quot;

 

 

 

 

(2024.05.22 방송)

 

 

2강  연의는 어디까지 사실인가

 

 

 

 

⊙ 나관중의 <삼국연의>

 

진수의 삼국지가 탄생한 지 천 년이 지난 후

또 다른 책이 중국에 나타난다

 

&quot;alt&quot;:&quot;나관중의 삼국연의&quot;

 

나관중의 <삼국연의>는 원래 이름이 따로 있다

일찍이 <삼국지통속연의>라 불렸다

진수가 쓴 <삼국지>라는 책을 세상에 널리 알린다는 뜻이다

 

&quot;alt&quot;:&quot;통속연의&quot;

 

<삼국지>는 꽤 오래 전인 1,700여 년 전에 쓰였다

그래서 <삼국지>의 문자와 구절이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편이다

현시대 사람들이 원문을 읽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게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뒤

나관중은 <삼국연의>를 통해 대중에게 진수의 <삼국지>를 널리 알리려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삼국연의>로 줄여서 불렀는데 오해를 하게 된다

<삼국지>와 <삼국연의>가 기본적으로 같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  <삼국지>와 <삼국연의>의 차이

 

진수의 <삼국지>는 서진 혜제 때인 원강 연간에 완성됐다

(서기 297년 완성, 원강 7년)

나관중의 <삼국연의>의 완성 시기는 불분명하다 

완성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로 의견이 분분하다)

 

&quot;alt&quot;:&quot;세 나라로 구분된 진수의 삼국지&quot;

 

<삼국연의>는 다른데 이야기에 따라 나뉜다

이야기의 내용이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다

이야기가 긴 경우는 다음 회로 넘긴다

그래서 <삼국연의>는 회별로 나누어져 있다

이유가 뭘까?

 

처음에 이 책은 공공장소에서 대중에게 읽어주는 책이었을 것이다

읽어주다 보니 시간제한이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 한 대목이 1회가 되고 이를 다 끝내지 못하면

다음 차례에 이어가야 하니 2회인 것이다

 

그래서 '회'라고 표현한다

내용을 구분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작품의 성격에 있다

 

진수의 <삼국지>는 정식 역사서다

기전체로 쓴 역사서이며 정사다

정해진 격식이 있는 데다가 역대 왕조, 황실 기구 등

쉽게 말하면 정부 기관의 정식 승인을 받았다

정사는 원칙에 따라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나관중의 <삼국연의>는 문학 소설이다

말하자면 장편소설이다

문학 작품이 추구하는 것은 예술성과 독자들을 이끄는 매력

그리고 흡인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문학 창작법을 써야 한다

이야기를 지어낸다거나 과장하고 부풀린다거나

교묘하게 사실이나 사건의 인물을 바꿀 수 있다

문학에서 이런 방법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이처럼 예술적 매력을 가진 <삼국연의>는

<삼국지>보다 더 큰 흡인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  <삼국연의>에서 유비와 한헌제의 만남

 

한헌제는 유비가 유씨 가문 사람이며 전한 황실의 후예라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그러고는 신하에게 황실의 족보를 가져오라고 한다

족보를 받아 들고 확인한다

전한 왕조는 한고조, 한해제, 한문제, 한경제까지 주요 4명의 황제다

그렇게 한헌제가 한경제까지 계산해 보니

유비는 후한의 한헌제보다 한 항렬 윗사람이었다

한 항렬 윗사람이니 숙부뻘이었다

그래서 한헌제는 유비를 황숙으로 인정하고 

이때부터 '유황숙'이라는 호칭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유비의 선조들 이름이 무엇이고 어떤 벼슬을 지냈는지

모든 세대를 아울렀다전한 경제부터 유비까지 총 19대를 말이다

그렇다면 이 족보가 과연 사실일까?

 

우리는 후한 헌제의 실제 족보를 찾아볼 수 있다

유비의 족보는 역사서에 기록돼 있지 않다

이처럼 이야기를 지어낸 목적은 뭘까?

유비의 신분을 높여 한헌제와 거리를 좁히기 위함이다

이후 유비가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하는 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려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  세 영웅이 여포와 싸워 동탁의 군사를 격파

 

&quot;alt&quot;:&quot;세 영웅이 여포와 싸워 동탁의 군사를 격파&quot;

 

여포의 병을 통솔하는 장수는 화웅이다

군웅 연합군의 선봉은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이었다

두 인물이 전투를 벌이는데 손견이 화웅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친다

연합군 진영으로 돌아오자 총사령관인 맹주 원소가 말한다

"누가 화웅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그러자 관우가 말한다

"제가 가겠습니다"

이때 다들 관우에게 따뜻한 술을 따라 준다

술을 따르자 관우가 말한다

"이 술은 여기 두고 돌아와서 마시겠습니다"

그렇게 칼을 들고 출전한 관우는 곧장 화웅에게 달려갔고

몇 번 겨루지도 않고 바로 화웅의 목을 베어버린다

말에서 뛰어내려 그의 목을 베고 진영으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술을 마시는데 완전히 식지 않아 온기가 남아 있었다

 

&quot;alt&quot;:&quot;화웅, 손견, 원소&quot;

 

 

&quot;alt&quot;:&quot;온주참화웅&quot;

 

그런데이 이 이야기는 사실일까?

<삼국지>에 실제 기록이 있다

하지만 화웅의 목을 벤 이는 관우가 아니라 손견이다

<삼국지의 손견전을 보면 확실하게 나온다

 

 

실제로 화웅을 죽인 공신은 손견이다

하지만 <삼국연의>에서는 관우라고 말한다

목적이 뭘까?

관우를 미화해서 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다

 

이것은 교묘하게 사실을 바꾼 건데 이로써

사건의 인물이 바뀌었다

손견의 공이 관우에게 돌아간 것이다

 

<삼국연의>에서는 이런 식의 내용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 훗날 <삼국연의>는 70%만 맞는다고 평가한다

30%는 허구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비율이 맞는지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삼국연의>에 진실과 함께 허구가 있다는 건 사실이다

 

종합해 보면 <삼국연의>와 <삼국지>의 근본적인 차이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는 역사서, 하나는 소설로 쓰여서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현재 두 작품 모두 시대를 초월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하나는 시대를 초월한 불후의 역사적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를 초월한 불후의 문학 작품이다

그래서 모두 불후의 명작이다

 

 

 

 

 

(2024.05.23 방송)

 

 

3강  위촉오 격동의 96년

 

 

 

 

삼국의 발전과 변화의 흐름

 

 

⊙  황건적의 난

 

삼국시대는 태동단계공식단계로 나뉜다

태동단계: 후한의 중평 원년인 서기 184년에 시작

그해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quot;alt&quot;:&quot;황건적의 난&quot;

 

장씨 성을 가진 삼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종교집단인 태평도를 만들었다

이들은 태평도의 교리로 교인 수를 늘려나간다

그렇게 전국으로 퍼지면서 교인이 수십만 명에 달하자

명분을 세워 정치적 구호를 외친다

 

&quot;alt&quot;:&quot;창천이 죽고 황천이 일어난다&quot;

 

이것이 바로 서기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이다

삼국시대의 태동 단계가 이렇게 시작된다

 

 

왜 황건적의 난은 삼국 시대의 시작이 된 걸까?

 

황건적의 난 때문에 후한 조정은 공포에 떨었다

정규군을 동원하려 했지만 병력이 부족하다고 느낀 조정은

주, 군, 현 등 각 지방 정부에 명령을 내린다

'지방 정부는 자체적으로 지방군을 조직해

중앙 조정을 도와 황건적을 진압하라'

 

이는 후한 왕조가 지방 정부로 하여금 사람들을

동원해 군대를 조직하는 걸 허락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군대들과 이들을 이끄는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후 후한 조정의 정규군과 대규모 지방군이

힘을 합쳐 황건적을 진압했다

그런데 이 시기 탄생한 지방 군대가 해산하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흡수하듯 큰 군대가 작은 군대를 흡수했고

결국에는 더 크고 강력한 무장 세력이 만들어졌다

 

후한 왕조가 황건적을 진압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해 필요했지만

이 무장 세력이 도리어 후한 왕조를 멸망시키는 상황이 돼버렸다

모순적이게도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

 

 

⊙ 동탁의 난

 

태동 단계의 형성에서 두 번째 중요한 사건은

바로 동탁의 난이다

 

&quot;alt&quot;:&quot;동탁의 난&quot;

 

황건적의 봉기를 진압한 뒤 후한 왕조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황태후였던 하태후가 권력을 쥐고 있던 당시

하진이라는 대장군이 강력한 군벌인 동탁을 불러들인다

군대를 이끌고 도성인 낙양으로 오라고 한 것이다

 

&quot;alt&quot;:&quot;하진과 동탁&quot;

 

후한 말기에 환관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다

 

&quot;alt&quot;:&quot;십상시&quot;

 

환관의 힘이 막강하다 보니 조정의 공식 행정기관은 물론

정권을 보좌하던 대장군 하진까지 모두 밀려나 버렸다

 

환관들을 없애고 싶었던 하진은 어떻게 하면 이를 실행할 수 있을까?

자신의 수하에 군대가 없었던 하진은 가장 가까운 무력을 빌리려고 했다

그는 서쪽 양주 출신의 동탁에게 병주에서 도성으로 오라고 청한다

 

&quot;alt&quot;:&quot;동탁에게 도움을 요청한 하진&quot;

 

낙양에 입성한 동탁은 환관 세력을 제거했다

하지만 동탁은 후한 조정까지 장악하게 된다

황제를 폐위하고 황제의 어린 동생을 왕위에 앉힌다

그가 바로 후한의 헌제인 유협이다

 

&quot;alt&quot;:&quot;소제를 폐위하고 진류왕을 황제로 세운 동탁&quot;

 

동탁은 새 황제를 세우고 하태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 일은 동쪽 지역이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황건적을 진압했던 지방 무장 세력이 불만을 갖고 일어난다

이 세력의 제후들인 군웅이 연합해 동탁을 토벌하려 한 것이다

이 연합군은 원소가 통솔했다

동탁은 낙양에서 버티지 못하고 황제를 서족 장안으로 피신시킨다

장안으로 옮긴 뒤 동탁은 어포에게 살해당하고

장안은 살육의 현장이 돼 버린다

 

당시 황제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소년 후한 헌제였다

 

&quot;alt&quot;:&quot;낙양으로 돌아간 후한 헌제&quot;

 

어린 황제는 떠돌이 신세가 된다, 그저 신분만 높은 거지와 같았다

이처럼 당시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앞서 황건적을 진압한 후 남겨진 강력한 지방 세력들이

서로 경쟁하게 되는데 이것이 군웅할거의 시작이다

 

&quot;alt&quot;:&quot;군웅할거&quot;

 

여러 영웅들을 뜻하는 군웅에는 조조와 유비가 있었다

삼국의 태동 단계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가장 강력한 경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렇게 장기간의 경쟁 끝에 세 개의 큰 세력이 막판에 남는다

 

&quot;alt&quot;:&quot;조조, 유비, 손권&quot;

 

이것이 바로 삼국시대 태동 단계에 있었던 변화의 큰 흐름이다

 

 

공식단계: 조조가 죽고 난 뒤부터이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자리를 이어받고서는 한헌제를 대신해 황제가 된다

후한이 멸망하자 조비는 정식으로 조위 왕조를 세우고 황제에 즉위한다

 

&quot;alt&quot;:&quot;조비&quot;

 

수도를 낙양에 옮기기도 한다

이게 바로 삼국시대의 공식단계로 삼국시대가 비로소 시작된다

 

&quot;alt&quot;:&quot;유비가 제위에 오른다&quot;

 

동부의 손권 역시 시간이 흘러 황제가 된다

세 나라에서 각각 황제가 나오고 서로 대치하며 대립하는 형국이

바로 삼국시대의 공식 단계이다

 

삼국 중에서는 촉한이 가장 먼저 멸망하게 된다

 

 

촉한 왕조의 기간은 유비의 황제 즉위 때인 221년부터

촉한이 멸망한 시점인 263년까지이다

촉한이 공식적으로 존재한 기간은 42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뒤이어 조위가 멸망한다

조위가 이전에 대군을 남부로 보내서 촉한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마씨가 조위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quot;alt&quot;:&quot;사마소와 사마염&quot;

 

사마염도 왕위를 이어받은 해에 조위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키고 서진 왕조를 세웠다

 

 

조위 왕조는 220년에 세워지고 265년에 멸망했다

존속 기간은 45년이다

 

촉한이 멸망하고 17년이 흐른 뒤 서진의 대군은

여러 경로를 통해 동남부의 손오를 공격했다

손오는 서기 280년에 멸망한다

(229년~280년 / 존속기간 51년)

 

그렇게 다시 천하가 통일되면서 삼국의 공식 단계도 막을 내린다

삼국의 태동 단계부터 공식 단계까지 살펴보면

184년에 시작해 200년에 끝난다

96년이라는 기간이다

 

 

 

 

(2024.05.24 방송)

 

 

4강  누가 더 강한가

 

 

 

 

촉한의 건국 영웅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창업을 시작했는지

충분이 이해하려면 우선 삼국 시대의 가장 기본적인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핵심적 자원과 변화의 큰 흐름에 대해서 말이다

당시 삼국의 세력이 핵심적 자원을 두고 서로 경쟁했기 때문이다

 

 

삼국의 세력 비교

 

1. 공간 자원

 

공간 자원이란 바로 지역인데 관할 지역의 크기를 말한다

삼국은 후한 정권에서 발전해 왔다

그래서 통일 왕조 시기이자 후한 시기였던

당시 중국 영토가 얼마나 컸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후한 행정구역은 주, 군, 현으로 구성된다

 

&quot;alt&quot;:&quot;후한의 행정구역&quot;

 

당시에는 주가 군을 관리했고 군이 현을 관리했다

이것이 바로 대략적인 후한의 당시 상황이다

후한 말기를 거치면서 삼국시대로 변화할 때

각국이 차지한 지역의 크기는 어땠을까?

 

조위가 총 13개의 주 중에 가장 많은 9개의 주를 획득했다

물론 그에 딸린 서역 지방을 포함해서다

이곳은 후한 시대에도 있었던 부속 지방이다

 

손권, 손오의 전성시대에는 3개의 주를 차지했다

실제 지역은 장강 중류의 형주와 하류의 양주,

그리고 영남 지방의 교주까지 해당된다

상당히 넓은 땅으로 남부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장강의 남부 지역은 손오가 갖고 있었다

 

개수로만 따지면 촉한은 단 한 개의 주로 가장 작다

 

&quot;alt&quot;:&quot;삼국의 공간 자원&quot;

 

공간 자원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촉한의 창업 영웅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알 수 있다

차지한 지역이 너무 좁으니 물자와 인구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2. 인구 자원

 

삼국의 인구 자원도 후한 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후한 말기에는 재적 인구를 기록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후한 말기 호적에 기록된 백성의 호수는

1,000만 호 가까이 된다

인구수로 보면 전국에 4,900만 명이 살았다고 한다

이는 후한 통일 왕조 때 수치이다

 

후한 말기가 지나 삼국시대에 이르러

삼국이 각각 관리한 인구에 대해 알아보겠다

촉한은 영토가 가장 작다 보니 인구도 가장 적었다

 

조위의 군대가 성도에 쳐들어와 촉한을 포위했을 당시

촉한 후주 유선이 투항했다

당시에는 투항하면 백성들만 넘기는 게 아니라

나라의 기본 자료도 넘겨야 했다

인구나 관리의 수를 포함해 군대 규모까지 말이다

 

당시 상납된 자료에는 공식적으로 호적에 올라가

관청에서 실제로 관리하는 재적 인구가 표시됐는데

촉한의 인구는 고작 90만여 명뿐이었다

 

손오가 멸망했을 때 넘긴 호적 기재 인구는 230만 명이었다

그리고 조위의 전국 인구는 400~500만 명이었다

 

☞  삼국의 인구수를 합하면 1천만 명이 안 된다

     후한 인구가 5천만 명이라고 했는데 나머지 4천만 명은 어디로 갔나?

  4천만 명은 후한 말기에 장기간의 전란 때문에 사망한다

※ 인구통계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차 있음

 

♧ 인구 감소 이유 ♧

  1. 전쟁  

  2. 역병

  3. 흉년

 

 

3. 군사 자원

 

삼국이 우열을 가리려면 싸워야 하고 싸우려면 군대가 있어야 한다

병력의 크기가 국력을 평가하는 기본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군대의 질적 수준도 중요하지만 군인의 수가 일단 받쳐 줘야 한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세 나라의 군대는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정도였다

촉한이 멸망할 때 상대국에 보낸 항서에는 당시 보유하고 있던 병력도 적혀 있었다

다 합쳐 봐야 10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총인구가 100만 명뿐이니 군사는 10만 명밖에 안 되는 것이다

손오가 멸망할 당시 인구는 200만 명 정도였다

그래서 재적 병력은 약 20만 명 정도였다

이런 비율로 계산하면 인구가 400만 명이었던 조위의 병력은

대략 40만 명일 것이다

 

&quot;alt&quot;:&quot;삼국의 군사 자원&quot;

 

그렇다면 촉한은 10만 명의 병력으로 40만 명의 조위 군대와 싸워야 했다

적을 무찌르고 멸망시키려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4. 도성 자원

 

도성은 각 나라의 수도가 있는 곳이다

 

삼국 중 도성이 바뀌지 않았던 곳은 촉한뿐이었다

성도를 도성으로 하여 촉한이 건국된 뒤

이 수도는 바로 익주의 행정 중심지로 결정된다

지금의 중국 쓰촨성 청두시이다

그 이후로 촉한의 수도는 변하지 않았다

 

조위의 수도는 약간의 변화만 있었다

최초 수도는 업현(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에 있었다

그런데 조조의 아들 조비가 정식으로 황제가 되어

즉 위문제로 즉위한 뒤에는 낙양(허난성 뤄양시)을 도성으로 정한다

 

가장 변화가 큰 건 손오였다

처음으로 손오에 정권이 세워졌을 때

수도는 오현(장쑤성 쑤저우시)에 있었다

훗날 나라 형편이 좋아지자 손오는 장강의 중, 상류로 세를 확장했다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손오의 도성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오현에서 경(장쑤성 전장시)이라는 지역으로 옮기게 된다

도성을 장강의 남부 연안으로 옮긴 것이다

이후 경에서 조금 더 상류로 옮기는데 이곳은 말릉현(장쑤성 난징시)이다

손오는 말릉으로 수도를 옮긴 뒤 지명을 건업이라고 바꾼다

 

&quot;alt&quot;:&quot;건국대업&quot;

 

훗날 상황이 또 바뀌면서 손오의 도성은 다시 상류로 옮겨진다

무창현(후베이성 어저우시)이다

훗날 손권은 무창현은 대규모 인구가 거주하기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또다시 건업으로 도성을 옮긴다

손오의 수도가 자주 바뀐 것은 정세 변화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수도는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흡인력과 응집력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도성 역시 핵심적인 경쟁 자원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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