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지은이 에드거 앨런 포
옮긴이 전승희
펴낸곳 (주)민음사
값 11,500원
![](https://blog.kakaocdn.net/dn/ywkd9/btrT9FPi8dA/mDxHCrAoHRgoqhHvtJNlX0/img.png)
실은 단편집이니 기분 좋게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어려운 책을 읽다가 지칠 때 기분전환으로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의 기대를 처참히 무너뜨린 책이다. 지식은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것이기에 우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용들부터가 모르는 것 투성이었고 저자의 지식수준을 쫓아가기에 버겁다는 느낌이 솔직히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집중해서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묘한 매력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이다. 총 14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복잡한 인간 심리의 묘사와 더불어 불가사의한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그의 세계 안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
자신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도 아니며 미신을 믿는 부류의 사람도 아니다. 그런 스스로가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믿어달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폭풍우를 만났던 주인공의 일기의 내용으로 비현실적이면서 미스테리한 경험을 담고 있다. 급변하는 바다의 모습과 그 속에서 만난 배 위의 사람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독자가 유추할 수 있는 힌트를 준다.
배와 그 안에 모든 것은 과거의 혼에 씌어 있다. 선원들은 묻혀 버린 세기의 유령들처럼 앞뒤로 미끄러지듯 걷는다._p.22
리지아
리지아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묘사와 평가가 이어진다. 어떤 수식을 갖다대어도 덧없다 말하면서도 아주 꼼꼼하게 그녀에 대한 감상을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했던 그녀의 죽음 이후로 겪게 되는 환상들과 그로 인한 또 다른 비극
그것은 아편 복용 후의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광휘, 단잠에 빠진 델로스의 딸들의 영혼 주변을 맴돌던 환상보다도 훨씬 더 광적으로 신비하고 공기처럼 가벼운, 영혼을 끌어올리는 듯한 환영이라 부를 만했다._p.27
어셔가의 몰락
소년시절 친구였던 어셔의 부탁으로 음침한 그의 저택에 가게 되는 주인공은 소름 끼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셔가의 음습한 분위기와 친구의 불안한 심리만으로도 닥쳐올 불운을 짐작케 한다.
다시 말하면 저택의 잿빛 벽과 첨탑들, 그리고 거기서 내려다 보이는 흐릿한 호수의 지세가 결국 그라는 존재의 사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_p.62~63
윌리엄 윌슨
기숙학교에서 십대를 보낸 주인공이 매우 불편했던 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명이인인 윌리엄 윌슨은 은근히 주인공의 일을 훼방 놓으며 신경을 거스른다. 느낌은 다르지만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에서 데미안이 떠오르기도 한다. 나와 닮은 또 다른 나.
나는 대대로 유난히 상상력이 풍부하고 흥분을 잘하는 성격으로 알려진 집안의 후손이다._p.86
군중 속의 사람
커피숍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주인공은 한 노인을 보고 호기심이 일어 그를 쫓는다. 같은 길을 오락가락하며 걷는 노인. 그가 정작 쫓았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얼굴에서 뛰어난 지력과 조심성, 궁핍과 탐욕, 냉혹, 악의, 피에 굶주림, 의기양양, 희희낙락, 극단적 공포, 그리고 너무도 강력한 절망, 절망 중에서도 최악의 절망을 읽을 수 있었다._p.126
소용돌이 속으로의 추락
벼랑 꼭대기에 선 그들은 바다의 급격한 변화를 목격한다. 세상 누구도 겪어 본 일이 없다는 일을 겪었다는 노인은 자신이 소용돌이를 만났던 일을 이야기한다. 믿을 수 없는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꽤나 과학적인 추론으로 접근하고 있어 기적에 가까운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그러니까 파편들 중에서 너덜너덜해진 것들만이 소용돌이에 완전히 흡수되었다가 나온 것들이며, 나머지 것들은 조수의 흐름이 이미 완만해진 뒤에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거나,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였든지 일단 소용돌이에 흡수된 뒤의 하강 속도가 아주 느렸기 때문에 밀물이나 썰물이 오기 전에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았을 거라는 겁니다_p.160
타원형 초상화
버려진 저택의 소박한 방에 자리잡게 된 주인공은 침대 기둥에 가려져 있던 그림 하나를 발견한다. 압도될 정도로 너무나 사실적인 소녀의 추상화
'이 그림은 정말로 생명 그 자체로구나!'_p.170
붉은 죽음의 가면극
엄청난 양의 피가 모공에서 흘러나오면서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끔찍한 병이 돌자 왕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내어 자신의 대사원으로 은둔한다. 무도회가 열리는 일곱 개의 색색의 방. 그중 검은 방의 벽시계 소리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온몸을 수의로 칭칭 동여매고 가장무도회에 참가한 한 사람. 그는 심지어 붉은 죽음의 열병 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불안과 초조, 두려움에서 비롯된 집단 광기의 환상일까. 안정된 공간이라고 여겼던 곳은 고립되고 폐쇄된 공간으로 변하고 만다.
구덩이와 추
종교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기절한 주인공 앞에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지하감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감옥 안의 구덩이, 천장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내 심장 부위로 가까워지는 낫, 죽기만을 기다리는 구덩이의 쥐떼들. 시시각각 변하며 숨통을 조여 오는 감옥은 죽음의 대한 공포로 인한 인간의 심리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종교재판의 전횡에 희생되는 사람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육체에 가해지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죽는 것과 극단적인 정신적 공포를 겪으며 죽는 것, 그 두 죽음 사이에 선택만이 있다고들 했다._p.192
배반의 심장
단지 그 눈 때문에 그 눈에 사로잡혀서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은 또한 자신의 불안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백하고 만다. 이유는 드러나지 않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 그의 예민함은 눈에 사로잡혔다가 살인 후에는 불안과 초조함이 만들어낸 환청에 사로잡힌다.
바로 그 눈 때문이었습니다! 그 노인의 눈은 독수리의 눈처럼 엷은 막으로 덮인 연한 푸른색이었습니다. 그분의 눈길이 제게 닿을 때면 제 피는 언제나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_p211
검은 고양이
자신이 저지른 일을 두고 '한 갓 집안일에 지나지 않는 아주 평범한 일련의 시건'이라고 말하는 그는 감당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기만 하다. 자신을 망친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다. 술탓을 해봐야 술을 들이켠 건 본인의 손이다. 동물을 사랑하고 온순하며 사려 깊은 어린 시절의 그를 죽인 것 또한 자신이다.
무지한 짐승의 헌신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에는, 인간 따위의 보잘것없는 우정과 덧없는 충성심을 시험해 볼 기회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_p222
도둑맞은 편지
파리 경시청 총감 G는 뒤팽을 찾아와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행방을 묻는다. 뒤팽은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특유의 분석력과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그 안에 다양한 학문적 관점이 묻어나는 것이 흥미롭다.
"사안이 너무 단순하다 보니까 오히려 오류를 범하나 보구먼."_p.240
아몬티야의 술통
오로지 포르투나토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그는 일부러 포르투나토와 친분을 유지하고 약점을 이용해 그를 유인한다. 결국엔 제 발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만다.
깡충 개구리, 혹은 사슬에 묶인 여덟 마리의 오랑우탄분명한 혐오에 맞선 확실한 복수극. 우둔하기 짝이 없으며 난폭하기까지한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약한 자들의 복수
이쯤 되면 거의 정신이 혼미해진다. 태풍 속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가 보이지 않는 존재와 싸우기도 하고 극악한 살인의 방관자가 되기도 하며 탐정이 되기도 한다. 복수의 화신이 되기도 하였다가 끊임없는 두려움과 불안함에 스스로를 죽이기도 하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떤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인간의 고뇌와 갈등, 불안과 잔혹함 등 다양한 모습을 한 명의 작가가 이토록 촘촘하게 묘사하는 것이 놀랍다. 그것도 같은 장르 안에서 같은 듯 또 다르게 변주하며 실감 나는 서사를 통해 독자를 설득하는 능력도 탁월하게 느껴진다. 혼돈과 난해함도 있지만 기묘한 매력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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