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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위대한 수업2(대중문화사) 4강~7강 요약정리

by 상팔자 2023.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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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3 ~)

 

 

EBS 위대한 수업2(대중문화사) 4강~7강 요약정리

 

위대한 여든한 번째 강연 '대중문화사'(시즌2 서른아홉 번째)

 

 

도널드 서순 런던대학교 퀸메리 칼리지 유럽 비교사 명예교수

저서 <사회주의 100년> 도이처상 (1997)

저서 <유럽 문화사> 알리시오 인터네셔널상 (2009)

나폴리 평생공로상 (2017)

Acqui Storia Award (이탈리아 문학상) 수상 (2019)

 

 

 

 

 

4강  대중음악의 탄생

 

 

< 음향과 음악의 역사>

 

 

음향과 음악의 발전은 기술 발달의 덕을 많이 봤다

소설보다 기술 발달의 덕을 많이 봤다

1800년 이전에 음악을 공짜로 듣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교회에 가거나 종교의식에 참가하는 거였다

음악을 듣는 또 다른 방법은 귀족 살롱을 열어서

직접 음악가와 작곡가를 부르는 거였다

물론 중요한 임무를 맡긴 했지만 결국 제복을 입은 하인이었다

18세기말 무렵에 하이든은 런던에 초대받았다

당시에는 런던에도 음악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콘서트홀이 생겨서 유료 관객에게 음악을 제공하고 있었다

런던은 경제가 발달하고 중산층이 증가하던 시기라서

하이든은 돈도 더 많이 벌고 존경도 받을 수 있었다

에슈테르하지 가문에서 벗어나 콘서트홀에서 더 많은 관객을 상대했다

런던에선 빈이나 파리보다 더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배출한 뛰어난 음악가는 없었지만 그런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사실 독일인들도 영국을 이렇게 평가한다

'음악이 흐르지 않는 땅'

하지만 상업이 발달한 국가는 자국에 없는 걸 그냥 수입해 버린다

그래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연주자와 작곡가가 영국으로 모였다

또한 영국엔 브로드우드란 회사도 있었다

브로드우드는 19세기 최고의 피아노 제조사였다

이런 변화는 음악 소비 방식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일단 음악을 듣는 사람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두 세기 전의 문화 생산자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18세기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생각해 보라

바흐는 300곡에 달하는 칸타타를 썼는데

라이프치히에 있는 한 교회의 신자만을 위해서만 쓴 곡이었다

오늘날 바흐는 비록 가요 차트 상위권엔 없지만

바흐의 음악을 듣는 청자의 수는 바흐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늘어났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건 기보법의 발명 덕분이다

피아노를 구입하려는 부르주아가 늘어나자 음악 교육도 확대됐다

특히 부르주아 가문의 젊은 여성들이 음악을 배웠다

부르주아 가문 사람들은 과거 귀족이 하던 걸 똑같이 따라 했다

작은 피아노를 사서 딸에게 강제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이렇게만 하면 귀족적인 척 살 수 있었다

음악 산업이 또 한 번 크게 발전할 환경이 이렇게 조성된 것이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녹음된 소리를 재생하는 축음기이다(1877)

축음기가 요즘 말로 '하드웨어'라면 축음기판은 '소프트웨어'다

 

1900년에 미국에서 팔린 음반이 300만 장인데

1910년엔 3천만 장으로 늘었고 11년 뒤엔 1억 4천만 장까지 늘어났다

미국에서 생산된 축음기의 수는 1909년엔 34만 5천 대였지만 

10년 뒤엔 220만 대까지 늘어났다

 

처음부터 음악 녹음 기술은 거대한 자본주의적 사업이 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주로 클래식 음악을 녹음했지만 훗날 '팝송'이라 불릴 노래들도

곧 엄청나게 많이 작곡되기 시작했다

 

19세기 나폴리에서 발표된 '나의 태양'이란 뜻의 '오 솔레 미오'는

100년간 인기를 끌었고 엘비스 프레슬리도 불러서 음반을 냈다

세계 각지의 외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당대 최고의 오페라 가수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사상 최고의 테너라 불리는 엔리코 카루소의 목소리나

유명한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를 말이다

예전엔 카루소가 뭄바이나 도쿄로 찾아오길 기다려야 했다면

이젠 하드웨어인 축음기를 사서 축음기판만 넣으면 됐다

사실 오페라의 세계화는 작곡가 본인들이 주도한 거였다

세계인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주제로 곡을 쓰거나

유명 베스트셀러를 곡으로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는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프랑스 희극 '세비야의 이발사'를

가극화해서 1816년에 발표했다

 

빈센초 벨리니는 내전 기간의 영국을 배경으로

'청교도'란 작품을 썼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프랑스가 배경이었다

'돈 카를로스'는 스페인, '아이다'는 고대 이집트가 배경이었다

 

푸치니도 일본을 배경으로 '나비 부인'을 썼고

'투란도트'는 고대 중국을 '서부의 아가씨'는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썼다

 

그러니까 애초에 19세기부터 오페라 작곡가들은 세계를 무대로 삼았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문화 생산자들은 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음악 소비가 한층 더 증가하게 된 건 라디오 덕이 크다

이젠 집에서 모차르트나 엔리코 카루소만 듣는 게 아니라

라디오로 새로운 노래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신곡들은 기존의 민요와 달리

정치나 노동을 주제로 삼지 않았고 교회 음악처럼 종교를 주제로 삼지도 않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주제로 삼았다

사랑, 연애, 과거의 향수 같은 감정을 다뤘다

미국인들은 음악 산업을 빠르게 키워 나갔다

처음엔 주로 단순한 노래를 만들었다

 

그 유명한 틴팬앨리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처음엔 이곳에서 출판사들이 악보 형태로 음악을 팔았다

그리고 1889년에 녹음기가 등장하는데

미국 대중음악 산업의 핵심 조직인 틴팬엘리 덕에

상황이 한층 더 미국에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국은 여전히 서로 다른 언어로 갈라져 있는 국가였다

인구에서 1세다 이민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음악은 모두를 통합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음악이나 노래를 만들 때도 

아직 문화적으로 분열돼 있던 다양한 청자에게 어필해야 했다

그중엔 그들만의 전통 대중음악이 있는 집단도 있었다

아일랜드나 이탈리아 이민자, 특히 흑인 사회가 그랬다

흑인의 음악은 남북 전쟁 이후에 급격히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중 재즈는 음악의 도시 뉴올리언스에서 19세기말에 탄생했다

재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서아프리카였다

미국으로 건너온 대부분 노예가 이 지역 출신이다

이후 재즈는 유럽 대중음악을 토대로 삼아 

색소폰 같은 유럽 악기를 활용해 발전해 나간다

 

재즈 자체는 서아프리카 음악에서 기원했지만

아일랜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음악을 차용하고 

서아프리카엔 없던 악기를 받아들이며 발전했다

 

벨기에에서 발명된 색소폰도 그 중 하나인데

사실 벨기에는 재즈로 유명한 국가는 아니다

당시엔 피아노를 비롯한 다양한 악기를 

신흥 중산층이 집에 들여놓기 시작했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악보의 배포가 훨씬 쉬워졌다

 

또한 음악계 거장이나 오페라 가수들이 유럽 전역을 돌며 공연했다

예전엔 궁정의 후원을 받아서 연주하던 오페라도 

돈을 낸 부르주아 관객 앞에서 연주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곧 음악을 녹음해서 팔기 위해 서 다양한 형식의 음악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음악을 산업화하려면 신흥 계급의 도움이 필요했다

음악 공연에 적합한 장소를 상업적으로 개발하고

오페라하우스나 콘서트홀에 자금을 대고 

집에 악기를 들일 수 있는 부유한 계급이 필요했다

부르주아 가문은 점점 음악 소비자로 변해 갔다

 

 

 

 

 

5강 대중음악 전성시대

 

 

음악 소비는 라디오 방송 덕에 많이 증가했다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 곳은 역시 미국이었다

1920년 11월 2일 웨스팅하우스사가 피츠버그의 한 차고에

라디오 방송국을 차리고 대통령 선거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웨스팅하우스사는 사람들이 라디오를 더 사게 하려면 

대선 결과를 방송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걸 곧 깨달았다

사람들이 듣고 즐길 음악이 필요했다

 

음악을 방송하면 방송국에도 좋은 점이 많았다

수십, 수백 년간 시험을 거쳐 살아남은 곡들이 이미 존재했다

오래된 명곡과 함께 신곡을 소개할 수도 있다

음악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와 가장 거리가 먼 예술 형식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쉽게 받아들였다

 

전위 음악부터 클래식, 대중음악까지 장르도 다양하고 풍부했다

1922년 3월까지 60개 방송국이 방송 허가를 받았다

2년 뒤엔 1천 개까지 늘었다(약 1,566% 증가)

1972년엔 미국 가정 4분의 1이 라디오를 갖고 있었다

라디오 청취가 전국적 열풍을 일으켰다

 

음악은 라디오 덕에 뉴스와 드라마를 밀어내고 입지를 다진다

1930년대에 이미 BBC에서 제작한 라디오 방송의 3분의 2가 음악 방송이었고

틀어주는 음악의 절반은 경음악이었다

독일, 이탈리아, 소련의 라디오에서도 음악 방송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방송사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중앙 정부가 세금을 걷어서 공기업에 운영을 맡기는 것이다

미국은 예외지만 유럽엔 이런 국영 방송이 많았다

국가가 방송국을 관리하고 국민은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다

정부의 이런 반독점 상태는 적어도 20세가 말까진 한동안 계속됐다

 

이를 위해선 균등한 상품이 유통되는 거대한 시장이 필요했다

미국은 라디오 방송 자금을 확보하려고 광고 수입을 활용했다

광고로 돈을 벌려면 단일 언어를 쓰는 큰 시장이 필요하고

어디서든 똑같은 상품을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

 

1920년대에도 그런 사회가 존재했다, 바로 미국이다

오직 광고 수입으로 운영되는 미국식 방송 모델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15세기 사람들이 어떤 음으로 노래했는지 알 수 없다

음의 빠르기나 높이 같은 것도 모른다

그런데 서양에서 정전의 반열에 오른 음악을 하나씩 되짚어가다 보면

독일의 수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로는 유럽이 사실상 세계 음악 시장을 주도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며 미국이 시장의 주도권을 넘겨받는다

1930년대 말기엔 유럽의 명망 있는 음악가, 작고가들이 미국으로 넘어갔다

어떻게 보면 미국은 대중문화를 수출하고 유럽의 고급문화와 문화인들을 수입한 것이다

 

월트 디즈니사는 고급문화를 접목한 실험작 작품을 선보일 때도 늘 대중을 염두에 뒀다

1940년에 개봉한 유명 애니메이션 '환타지아'는

음악의 악절들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려 한 작품이었다

바흐, 베토벤, 스트라빈스크 같은 클래식 작곡가들의 곡을 활용했다

이처럼 유럽의 고급문화를 차용한 덕에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정통 문화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후 미국인들은 새로운 음악 장르를 개발한다

오페라보다 가벼운 유럽의 오페레타에서 영감을 받아 뮤지컬을 창조했다

1945-1960년은 위대한 할리우드 뮤지컬의 전성기였다

미국인은 뮤지컬을 만들어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리고

뮤지컬 음악을 녹음해 거대한 시장을 창조했다

1930-1940년대엔 미국에 뮤지컬 형식이 자리 잡으면서

'이스터 퍼레이드'같은 성공적인 뮤지컬이 등장한다

그리고 미국은 1950년대에 이르러선 세계 음악 시장을 주도하는 최고의 음악 생산자가 됐다

음반 시장도 사실상 미국 업체들이 지배했다

미국의 RCA 빅터, CBS와 영국의 EMI가 시장을 양분했다

 

지리적 위치도 중요하다 

1960년대부터는 영국 뮤지컬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런던이 세계 연극의 중심지인 덕이 컸다

수천 명에 달하는 미국 관광객은 '구 유럽'의 나머지 지역을 방문하기 위해서

런던을 반드시 거쳐 가야 했다

이때부터 영국 뮤지컬이 연달아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음악을 작곡한 '요셉 어메이징 테크니컬러 드림코트'가

1968년에 히트하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도 1971년에 히트했다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작으로는 '레 미제라블'이 있는데

영미식으로 각색한 프랑스 뮤지컬이다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원작을 각색한 작품인데 한 범죄자와 매춘부가

구원받는 내용이다

19세기에 프랑스인이 쓴 프랑스 소설을 각색한 미국 스타일의 뮤지컬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로큰롤이란 새로운 장르가 등장하면서 대중음악 붐이 일어난다

'로큰롤'이란 단어엔 성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는데

흑인들의 속어를 아는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로큰롤'은 '성관계를 한다'는 뜻이다

1955년 미국에서 탄생한 로큰롤은 재즈 중심이었던 기존의 음악 미학을 재편한다

 

재즈로 부와 명성을 얻은 프랭크 시나트라, 도리스 데이가 물러나고

엘비스 프레슬리 , 빌 헤일리, 리틀 리처드, 버디 홀리 같은 스타가 등장했다

 

로큰롤은 다른 음악적 표현의 발달을 저해하진 않았다

1964년은 비틀스의 해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페툴라 클라크의 팝송 '다운타운'도 그해 세계적 성공을 거뒀다

음악계에서 성공하려면 남의 걸 빌려와서 혁신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아시아의 음악 장르는 

한국의 대중음악인 케이팝이다

 

다른 모든 성공한 장르처럼 케이 팝도 다양한 음악을 차용했다

재즈가 아프리카나 아일랜드 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음악의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음악이 확산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1980년대엔 필립스가 개발한 CD가 등장한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음악 산업에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 등장한다

디지털 혁명과 인터넷의 발달이다

컴퓨터 다운로드와 CD 굽기가 활성화되면서

가정용 음향 기기 판매량이 급감했다

일체형 CD 플레이어나 스테레오 앰프의 판매량이

미국에서 2003년 상반기엔 30%나 감소했다

 

미국과 함께 음악 산업을 지배했던 영국에선

1980년대 당시 음악 산업 종사자만 11만 5천 명이었고

개인 소비자가 음악에 지출한 돈이 29억 파운드(약 4조 7천억 원)에 달했다

다시 말해서20세기말의 영국 음악 산업은 화학 산업이나 조선 산업보다

규모가 컸다는 것이다, 음악인 노조가 광부 노조보다 컸다

그보다 2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음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황에 맞는 감정을 유발해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도록 해준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공짜로 즐길 거리가 주어지는 셈인데

19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이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엔 음반이나 음악 방송이 없었기 때문에 

어딜 가든지 침묵과 자연 소음만 가득했다

음악 소비량은 신기록을 경신한다

신세대는 늘 새로운 방식으로 음악을 소비한다

똑같은 음악이라도 소비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6강 영화와 텔레비전

 

 

영화과 발명되고 대중화되면서 모든 사회 계급이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생겨났다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은 민주적인 문화가 등장한 것이다

또한 영화가 등장하면서 유럽의 문화 자급자족 시대도 사실상 끝났다

미국에서 생산된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유럽인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특히 영화, 만화, 대중음악을 많이 소비했다

영화의 발상지가 유럽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반적으로 영화가 최초로 상영된 날짜는 1895년 12월 28일이라고 여겨진다

파리의 한 카페에서 단편영화 유료 상영회가 열렸는데

그증 한 영화의 제목은 '라 로제'였다(영화 <정원사>(1895) 루이 뤼미에르 감독 작)

50초 분량으로 고정된 카메라로 원 테이크 촬영을 했다

어디서 따온 이야기인지는 명확하다

과거의 서커스 광대극이나 카바레 쇼, 익살극, 만화를 참고해 밑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또한 기존에 발표된 대중 소설도 영화로 많이 각색됐다

 

당시엔 무성 영화의 시대였는데 제작 비용을 아끼려고

그냥 피아노 연주자 같은 반주자를 썼다

보통 영화를 배급할 땐 반주자의 연주에 도움이 되도록 

지시 사항을 함께 전달했다

 

즐거운 사건이 일어났을 땐 아일랜드식 춤곡을 연주하고

우울한 상황에선 러시아의 애절한 노래를 연주하란 식이다

(무소륵스키 같은 작곡가의 곡) 

또한 종교 음악이 필요할 땐 헨델의 '라르고'를 연주하고

드라마 ;론 레인저' 같은 서부극을 상영할 땐

늘 로시니의 '빌헬름 텔 서곡'을 연주했다

 

무성 영화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지만

유성 영화를 제작하려면 더빙 장비가 필요했다

배우들이 말하는 대사를 영화를 상영할 국가의 언어로

다시 녹음해야 했다

 

또한 미국의 텔레비전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며

더빙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식인들의 숭배를 받고 대학 강의의 소재가 되고

학술지에서 논의되기까지 오래 걸렸다

심지어 지금도 영화를 보러 가는 건 연극이나 오페라를 보는 것처럼

고급스러운 문화 소비로 여겨지지 않는다

 

평론가들이 영화관에 대해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영화관에선 누구나 어깨를 맞댄다는 것이다

경찰과 군인, 매춘부와 숙녀도 의사와 노동자, 아이와 부모도 어깨를 맞댄다

영화 관객은 이전의 다른 공연 관객들보다 사회적으로 더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었다

 

영화 산업이 성장하면서 이전에 없던 직업과 일자리가 생겨났다

영사 기사, 배급업자, 필름을 복사하는 기술자도 생겨났다

이미 있던 직업도 새롭게 바뀌었다

무성 영화 극본을 쓰는 건 희곡이나 오페라 대본을 쓰는 것과

전혀 다른 직업이다

대사 없이 상영될 영상의 줄거리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는 감독하는 방식도 연극과 달랐다

영화감독은 원하는 시퀀스만 프레임 안에 넣어서 

자기만의 관점을 보여줄 수 있다

무성 영화는 대사가 없어서 초기 영화들은 수명이 짧았다

무성 영화 시대에 영화 15만 편이 제작됐는데 살아남은 영화는 거의 없다

 

그래서 편집 기술이 발달했다

클로즈업 숏을 활용하거나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화면 구성에 변화를 준 것이다

클로즈업 촬영 덕분에 관객은 배우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됐다

연극배우들과 달리 영화배우는 얼굴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영화의 핵심인 몽타주이다

편집인데 이 역시 연극에선 불가능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진 유럽이 영화 시장을 지배했다

그러다 미국 영화 산업이 할리우드에 자리 잡으면서

미국은 세계 최고의 영화 수출국이자 생산국이 됐다

미국 영화계는 스타들을 만들어 냈고

유럽 영화계에선 볼 수 없던 체계적인 자기 평가를 지속했다

영화 스타는 숭배의 대상이 됐다, 과거의 오페라 디바보다 더 숭배받았다

 

모든 영화가 훗날 개봉할 영화들의 마케팅 수단이었고

배우들은 정형화된 배역을 맡아서 연기했다

매력적인 여자, 덩치 큰 남자, 강인하고 잘생긴 남자,

웃긴 남자, 지혜로운 노인, 원칙주의자, 가학적인 폭력배, 멋진 신사,

멍청한 금발, 거칠고 세상 물정에 밝은 여자 같은 다양한 캐릭터가 있었다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의 인간 군상을 캐릭터로 만든 것이다

 

미국 영화가 세계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유럽 문화를 재활용해 대중적으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영화는 더 속도감 있고 흡입력 있고 재밌었다

편집과 각본의 수준이 높았다

당시 영국에서 상영된 영화의 절반이 미국 영화였고

나머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영화가 채웠다

미국은 조직적으로 영국의 인재를 하나둘 빼냈다

한 평론가가 말하길

영국 스타는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고 할리우드 스타가 영국 영화를 만든다고 할 정도였다

 

유명한 영화감독인 찰리 채플린과 히치콕만 봐도 알 수 있다

다 영국인이지만 미국으로 가서 활동했다

독일 감독 프리츠 랑과 프랑스 감독 장 르누아르, 오스트리아 감독 빌리 와일더도

 

 

그리고 텔레비전이 등장한다

1939년까지만 해도 영국의 TV는 2만 대에 불과했지만

1963년엔 1,250만 대로 늘어난다

이 무렵엔 독일도 8백만 대, 프랑스도 3백만 대까지 늘어났다

그리스엔 1969년이 돼서야 TV가 들어왔는데

1950년대에 TV를 받아들인 베네수엘라보다도 한참 늦었다

 

TV 시청은 사람들이 문화를 즐기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TV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이후로 스포츠 중계 같은 몇몇 방송은 끼리끼리 모여서 봤다

남자들은 좋아하는 술집에 친한 남자 친구들과 모여서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며 중계를 본다

가족과 차분하게 맨 정신으로 스포츠 중계를 보는 경우는 드물다

옛날엔 국민들이 정치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정치인이 지지자를 큰 광장에 모아서 연설하면 정치인의 말을 전해 들은 지지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말을 그대로 전하곤 했는데 이젠 TV에서 직접 연설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은 넓은 시청자층을 확보하면서 그들만의 자기 인용적 세상을 창조했다

뉴스 앵커, 진행자, 토크쇼 사회자, 코미디언, 배우로 이뤄진 세상이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배우들은 TV를 얕봤다

TV를 발판 삼아 영화계나 연극계로 진출해서 진짜 인기와 명성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곧 TV시청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단역 탤런트조차 연예인 대접을 받게 됐다

 

그리고 리얼리티 쇼라는 새로운 TV 장르가 등장한다

 

미국식 뉴스, 대하드라마, 시트콤의 성공은 미국 소프트 파워 증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TV 드라마 '댈러스'는 

텍사스를 배경으로 한 텍사스 백만장자들의 이야기지만

전 세계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세계인이 미국 영화와 TV 픽션의 공식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미국인이 미국인을 위해 만든 미국 배경 드라마가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뉴스를 꾸준히 시청하는 유럽인이나 뉴스를 챙겨 보는 한국인이라면

미국의 정세를 속속들이 알 수 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미국의 정치는 잘 알 수 있다

반면에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그 수치를 보면 정말 놀랍다

 

미국은 타국의 텔레비전과 사실상 단절돼 있다

미국은 외국 방송을 절대 황금 시간대에 방영하지 않는다

TV 다큐멘터리엔 섹스, 죽음, 폭력이 주로 등장한다

다큐의 주요 하위 장르는 세 가지가 있는데

자연사 다큐에선 동물들의 사냥이나 짝짓기 습성을 주로 다룬다

또한 과거의 민족학 다큐에선 검은 피부의 원주민과 그들 기이한 의식을 주로 다뤘다

한편 역사 다큐에선 제1차 세계대전 이야기를 많이 다룬다

제2차 세계대전이나 나치 독일 홀로코스트 얘기도 많다

미술사 다큐도 강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TV라는 매체의 다양성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곧 TV 채널의 수가 급증했다

그리고 비디오 녹화기가 등장하며 직접 방송을 녹화해서

원할 때 틀어 보거나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넷플릭스 같은 구독형 서비스가 등장하고

인터넷이 등장하며 가정용 개인 엔터테인먼트가 발달했다

 

이젠 모든 형태의 문화를 누구나 즐길 수 있다

가난하거나 글을 몰라도 상관없다

이게 바로 영화, 텔레비전 같은 영상물이 일으킨 놀라운 변화이다

 

 

 

 

 

7강  미국과 유럽의 문화 패권

 

 

과거의 문화 산업은 세계적으로 분업이 잘 이뤄져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서양의 문화적 가공물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단일 국가가 문화 패권을 차지하진 못했다

 

이탈리아는 지중해라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로마 제국이 남긴 유산도 있고 그리스, 바이킹, 아랍, 스페인에

자주 침공 당하면서 르네상스까지 세계 문화를 지배했다

하지만 1800년에 접어들면서 오페라만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한편 기악은 1700년부터 독일 작곡가들이 지배했다

 

소설에선 영국 작가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발자크 같은 프랑스 작가나 러시아의 빅토르 위고,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도 인기를 얻었다

 

구상 미술에선 1800년 전까지만 해도 네덜란드가 강세를 보였다

이탈리아, 독일도 강세였다

그러다 프랑스가 구상 미술의 중심지가 되며 외국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네덜란드의 반고흐, 영국의 알프레드 시슬레,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스페인의 피카소도 프랑스로 갔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문화계가 급변한다

미국 영화는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 시장을 지배하게 됐는데

대중음악 분야에서도 미국이 점점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1930년대의 미국 음악가들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은 곧 소설 시장에도 침투한다

특히 스릴러나 탐정소설 같은 대중소설을 지배했고

헤밍웨이, 포크너, 스타인벡,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거물 소설가도 등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패권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 미국이 왜 패권을 쥐었을까? ★

 

좋은 근로 환경, 높은 임금

유럽의 박해를 피해서 구대륙의 영화 제작자,

기술자, 배우가 미국으로 몰려들면서 

유럽 영화 산업은 자원이 고갈됐고 할리우드만 득을 봤다

 

미국 문화가 세계적 성공을 거둔 또 다른 이유는

유럽 문화를 재활용해서 대중적인 표현 양식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국 작품은 유럽의 원작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또한 증명하긴 힘들지만 미국이 성공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당시 미국 영화는 유럽 영화보다 수준이 높았다

더 속도감과 흡입력이 있고 재밌었다

편집도 더 잘하고 각본도 잘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 시장의 특이성에 숨어 있다

1880-1890년대 미국에서는 이민자가 대거 유입되면서

인구 구성이 유럽의 축소판이 돼버렸다

당시 미국엔 영국인이나 아일랜드인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 폴란드인, 독일인, 유대인도 유입됐고

스칸디나비아 사람도 유입됐다

최근 해방된 노예들도 살고 있었다

 

이런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거기에 맞는 상품을 개발해야 했다

다양한 집단을 최대한 많이 만족시킬 수 있는 

문화상품을 생산해야 했다

이처럼 다양한 소비자를 만족시켜야 하는 시장에서

미국의 영화, 음악, 만화는 시험을 거쳤고

곧 대서양을 건너 세계를 정복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19세기말의 유럽 아니, 세계의 그 어느 도시도

빠르게 성장하는 미국 대도시의 인종 다양성을 따라갈 순 없었다

피츠버그, 뉴욕, 로스앤젤레스가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유럽을 넘어선 분야가 하나 더 있다

 

미국은 TV 연속극 시장에서도 양적, 질적으로 유럽을 앞서나갔다

연속극이란 신문의 연재소설을 화면으로 옮겨놓은 장르인데

19세기에는 큰 성공을 거뒀었다

시리즈 영화는 동일한 캐릭터들이 나와서 각 편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연속극은 한 편, 한 편의 이야기가 다 이어져 있다

장편 영화를 여러 편으로 쪼개 놨다고 보면 된다

연속극의 가장 큰 장점은 시청자가 이야기에 한번 빠지면 계속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연속극의 기술은 영화에도 그대로 접목할 수 있는데

이런 기술을 영어로 '클리프행어'라고 한다

주인공이 에피소드 후반부에 벼랑에 매달린 채 방송이 끝나면

시청자는 주인공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다음 편을 기다리게 된다

 

토마스 하디의 유명 소설 '푸른 눈동자'에서 유래한 기술이다

그래서 소설 다음 권을 사듯이 드라마 다음 편을 보는 것이다

이런 소설에서 얻은 교훈을 다양한 장르의 TV 방송에 사용한 것이다

 

비유럽 국가들은 음악 시장 진출에 애를 먹었는데

아시아 국가들은 자국 음악에 미국적 요소를 결합해 성공을 거둔다

팝송이 대만에서 인기를 얻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고

케이 팝이라고 불리는 한국 대중음악도 이렇게 성공을 거뒀다

 

미국 패권 법칙의 유일한 예외는 '망가'라고 불리는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다

한때는 미국 만화가 세계 최고라고 불렸지만 

현재는 일본 만화가 미국 만화보다 잘 팔린다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 성공을 거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오징어 게임'이나, 복수 스릴러 '더 글로리', 영화 '기생충'이 대표적이다

'기생충'은 비영어권 작품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도 수상했다

다양한 TV 채널이나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었다면

한류 현상은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문화 상품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계속 변하고 있다

 

앞으로 책은 종이로 출판하는 대신 태블릿으로만 읽게 될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늘 존재하겠지만 그걸 전자책이나 인터넷으로 읽는 것이다

카세트와 비디오는 이미 사라졌고 CD는 사라지기 직전이다

이제 음악은 인터넷으로 듣는데 음악 소비량은 역대 최대이다

TV 화면은 더 커지고 화질도 훨씬 좋아졌다

요즘엔 영화를 더 싸고 편하게 보기 위해서 영화를 TV로 보는 사람도 늘었다

 

문화상품이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이 바뀌면 제작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최근엔 소비자 맞춤형 광고도 등장했다

구글이나 아마존처럼 상품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만 광고를 표시하는 것이다

 

19세기 신문사들의 사업 모델은 신문을 팔아서 현금을 벌어들이고

신문 구독자가 광고주에게 팔아넘기는 거였다

광고주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신문을 볼지 예상하고 광고를 내야 했다

그런데 요즘은 잠재 고객을 예측하기 훨씬 쉬워졌다

젊은지 늙었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좌파인지 우파인지 알 수 있고

교육 수준까지 알 수 있다

 

상호작용이 가능한 매체는 힘없는 생산자에게도 힘을 준다

자신의 기술이나 서비스를 지역, 전국, 세계에 홍보하고 싶으면

이제 굳이 비싼 광고비를 지불할 필요 없이 자기 홈페이지만 만들면 된다

월드와이드웹이 등장하면서 세계 문화의 공통적인 요소가 많아졌다하지만 그만큼 문화 생산자도 늘어났고 계속 늘어날 거기 때문에앞으로 생산되는 문화상품은 과거의 문화처럼 획일적이진 않을 것이다문화가 더 세분화되고 다양해질 거란 뜻이다

 

그 결과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문화들이 급속하게 세계화될 것이다

미국 문화가 강세였던 과거엔 미국의 방송 제작자들이 TV 드라마 '댈러스'가 미국에서 성공을 거뒀으니까 프랑스에서도 성공할 거라며 방송을 팔곤 했다요즘은 웬만한 건 다 넷플릭스에 올라온다시청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으니까 훨씬 민주적이다

소비자에게 더 많은 자유와 선택지가 주어지면

각 집단은 좋아하는 문화만 소비하고 실험적인 선택을 안 할 것이다

지구촌이 여럿으로 잘게 쪼개지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까지 존재했던 문화 제국주의를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이런 문화의 다양화를 슬퍼할 필요는 없다

문화 제국주의 때문에 특정한 문화적 체험, 주제, 양식이 사라진 걸

유감스러워할 수는 있지만 이런 일은 늘 있어 왔다

 

오페라 공연은 예나 지금이나 늘 똑같은 레퍼토리만 반복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

보호주의 정책을 펴거나 공영 방송을 계속 운영하면 

다양성 유지에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다양성과 변화는 문화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지난 200년간 서구는 전 세계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문화상품을 공급해 왔다

이게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는 건 대쪽 같은 도덕주의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오늘날의 문화가 정말 과거의 문화보다 나쁜지 판단해 보라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과거를 잘 분석해서 현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어떤 문화가 좋은지 판단하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고급문화든 저급문화든 셰익스피어든 틱톡이든

문화가 없는 세상은 오늘날의 세상보다도 훨씬 야만적일 거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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